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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돌아갈 수 없는 곳

벼리 | 기사입력 2005/03/21 [00:11]

판교, 돌아갈 수 없는 곳

벼리 | 입력 : 2005/03/21 [00:11]

▲ 어수선한 빈 집 툇마루에서 마주치자 깊은 상처가 도지는 아찔한 순간.     ©2005 벼리

환경이나 생태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지역적 이해관계에 얼마나 성남시가 충실했는지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사업시행기관들이 얼마나 배려하고 살폈는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보상문제로 인한 인간성 파괴에 대해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곳으로 인해 조장되고 있는 투기열풍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개발이익규모 얘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곳에서 이미 재미봤다는 정치하는 것들, 관리들 얘기 따위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 제게 '판교 신도시'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2의 강남'이라는 말입니다. 분당신도시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이러쿵저러쿵 할 것도 없이 판교 신도시의 '진실'일 것입니다. 판교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신문과 방송이 쏟아내는 이 진실 같지 않은 진실을 접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낍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문화의 산물들과 자연이 그 장소에 맞게 어우러지고, 무엇보다도 따듯한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길 소박하게나마 고대해온 저는 늘 패배자로 남는가 봅니다.
 
'제2의 강남', 이 말에 더 보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말에서 강렬하게 연상되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거대한 상상의 동물 '불가사리'입니다. 그 불가사리가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그렇고 그런 이들의 과잉욕망이 거대하고 끈끈한 덩어리로 엉켜 이루어지고 통제가 불능함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이상한 나라, 이상한 시대'의 한복판에 제가 아무 일도 없다는듯이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뿐입니다.
 
게다가 저는 성남 개발 초창기에 들어와 성남 구시가지의 변화를 몸소 겪었습니다. 제 경우, 그 변화는 '주변인의 삶의 역사'로 깊이 각인되어 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금도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분당 개발의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또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간직한 지역"(성남시사)인 판교 일대의 개발을 다시 또 보게 될 것입니다. 주변부의 삶을 살아온 저로서는 주변부의 시선을 가졌기에, 주변부에 가해지는 공권력의 폭압과 그에 영합하는 비뚤어진 욕망의 배설을 다시 또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면서, 차마 인내하면서 말입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저항할 수 없다면 가해자들에게 상처라도 내고 싶습니다. 신도시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한꺼번에 와장창 지워버리는 그곳을 얼마나 아프게 느끼고 있는지 말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이 일은 제 주관에서가 아니라 그곳의 상처로부터 자연스럽게 출발됩니다. 판교 일대 사람들이 떠나간 빈 집들, 포크레인을 동원해 때려부순 집들의 잔해, 어지럽게 널부러진 가재도구들, 아직도 저항을 접지 않은 마지막 남은 사람들, 상처받은 그 삶의 흔적들……. 상처가 있기 때문에 상처를 깊이 느끼고 그 상처를 가한 자들에게 상처를 내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목격한 그 상처는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인 개인에게도, 시대의 역사에도 남을 만한 것입니다. 상처의 출발이 결국은 머리 끝에서 발톱 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자본의 논리, 그 피의 논리가 아니면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상처는 그만큼 깊습니다. 시간의 주름이 켜켜이 쌓인 곳을 불온한 욕망에 아부하면서 공권력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지워버리는 일은 본질에서 삶과 역사를 지우는 일입니다. 어떤 이유, 어떤 근거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신도시를 만든다고 해도 제대로 된 도시는 결코 하루이틀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판교 신도시가 과거의 신도시와 다르다고 사탕발림해도 아직은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신도시에 사는 현실에서 어떤 신도시도 아직은 도시의 성숙과 도시의 색깔, 특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따스한 온기를 보여준 사례는 없습니다. 파괴하기는 쉽지만 창조하기는 백배천배 어렵습니다. 이것을 지금 사람들이 몸으로 배울 수 있을지 저로선 지극히 의문입니다. 신도시와 신도시의 삶이 예전의 그곳과 그곳의 삶보다 더 낫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집을 지키던 개가 주인을 잃고 망막하게 동네를 어슬렁거리듯 그렇게 한나절을 판교를 돌아다녔습니다. 곧 꽃망울들을 환하게 터뜨리려던 마을의 살구나무, 산수유나무, 탱자나무는 무참히 베어지고 뽑혀져 버렸습니다. 판교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지워지고 있는 시간입니다. 시대에 쫓겨, 밀리고 스러져 가는 그곳에서, 그곳 삶의 흔적들에서 남는 것은 다만 상처 뿐입니다. 성남에서 주변인으로 살아온 제 가슴에 남는 것은 다만 상처 뿐입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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