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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

벼리 | 기사입력 2005/04/25 [16:58]

시골길

벼리 | 입력 : 2005/04/25 [16:58]
▲ 예산 대흥산 산자락에 터한 마을에서 바라본 어떤 시골길.     ©2005 벼리


내가 종종 '개념의 도시'로 간주하는 도시에서 길은 업무지구, 상업지구, 주거지구와 같은 균질화된 공간의 구획 사이에 놓이기도 하고 그 공간 안에 놓이기도 한다. 그것은 획일적인 어떤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거의 예외없이 구부러진 곡선이 아니라 변화가 없는 직선이다.
 
그 길에서 내 느낌과 상상은, 또 마주치기도 하고 인연지어진 사람들과의 소통의 애틋한 이야기는 부재함 또는 빈약함을 면하기 어렵다. 하다못해 이 도시는 안타깝게도 어린것들에게 내게 남아 있는 어릴 적 골목길의 추억조차 전수되고 있지 않다. 도시에서 길이 어찌 길이 길이겠는가.
 
반면 한적한 시골에서는 아직은 길을 만나곤 한다. 그 길은, 이를테면 길 같은 길이다. 존재론적 느낌이 강하게 일기 때문이다. 이 때 그 길은 사람을 심연으로 빠뜨린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임존성이 자리한 대흥산 산자락에서 만난 어떤 시골길이 그렇다.
 
옛 선비의 무덤 곁에서 지긋이 바라본 그 길은 내가 서 있는 대흥산 산자락에 기대어 터 잡은 마을과 자그마한 들판 건너편 또다른 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길이 폐부 깊이 들어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곡선의 유려함에 있어, 다만 산을 끼고 감아들면서 자그마한 들판을 건널 때조차 냅다 가로지르지 않고 살찍 비껴간듯한 느낌을 주는 탓이다.
 
그 길은 또 산자락을 끼고 내려가다가 들판을 지나 다시 산자락을 끼고 올라온다. 요즘 도시와 도시 주변에서 극심하게도 땅을 파내고 양편으로는 콘크리트벽을 쌓으면서까지 길을 내는, 그 무식한 짓과는 원초적으로 다르다.  

이런 길에서 이 길을 내었거나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씨를 찬찬히 읽는다. 그것은 좁게는 땅에 대한, 땅에 빌붙어 사는 이들의 두려움 내지는 외경일 터이지만 보다 넓게는 '있는 그대로'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답하는 천연성품이 아닐까 한다.
 
이런 천연성품이 개념의 도시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상실되어 버렸다. 근대적인 지식과 그 지식의 옹호자들, 발빠른 앞잡이들이 그것을 삼켜버린 탓이다. 그 결과, 도시인들의 시선에 다가오는 것은 삭막한 건조함이나 싸늘한 황폐함 뿐이다. 내가 도시에서 현재가 아닌 미래를 연상할 때도 종종 회색빛 암울함부터 밀려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본 이 시골길은 우리 시대에 하나의 '저항의 기호'이다. 이 풍경은 기호 이전에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의 본질적인 힘을 간직하고 있어 생동한 것이다. 내 눈길이 그 길을 따라가다가 종내 그 길이 끝나는 소실점에서 다시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의 길로 들어서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 高度
  • 슬픔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 無題
  •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 이것은 神이다
  • 몽골 초원에서
  • 계란으로 바위치기
  • 어떤 사소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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