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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벼리 | 기사입력 2005/05/06 [01:23]

대숲

벼리 | 입력 : 2005/05/06 [01:23]
▲ 충남 예산에 있는 대흥산자락. 그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대숲이다.     ©2005 벼리


대숲을 본다. 대흥의 대숲은 지금 봄을 만끽하고 있다. 한이 서린 백제의 마지막 산 대흥산으로부터 쏜살같이 달려오거나 황량한 들판 가득 한기를 몰고 온, 맵찬 겨울바람을 이겨낸 것이다. 더구나 이 곳은 저 따스한 남녘에 속하지 않는다. 지독히 추운 겨울 끝에는 종종 대숲이 온통 마른 갈색으로 변해버린 것을 나는 기억한다.
 
마치 길고 잘 뻗은 노인의 눈썹 같기도 하고 또는 그렇게 깊이 패인 청년의 눈 같기도 한 댓잎들은 맑고 푸르다. 색으로 치면 연두에 가깝지만 왠지 겨울을 이겨낸 그 강인함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는 탓이리라. 맑고 푸르름을 드러내는 댓잎들은 사실은 저마다 색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다. 댓잎들이 그런 것처럼, 대나무들도 그렇다. 그렇다, 세상에는 같은 것이 없다. 다만 비슷함, 유형만이 그것을 분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댓잎들이 봄 햇살을 어루만지면서 바람과 더불어 종종 그 절정의 환희를 투명한 빛으로 선사한다. 눈이 부시다.
 
댓잎들이 잔잔한 봄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왠일일까. 갑자기, 꽉 찬 나이일 테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내가 한 동안 알고 지냈던 여가수가, 그녀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저 남녘에서 자란 그녀는 누군가 자기의 노랫소리에서 댓바람 소리가 난다고 수줍게 들려주며  내 간청에 따라 자기 노래를 불러주었다. 자본과 유행과 명성에 포장되지 않은 그녀의 노래를 나는 지금도 음반으로 듣는다. 그 날것의 순수함이란.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군자라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그 말, 고상함을 넘어 숭고함의 미의식으로까지 승화되고 전승되어온 그 인문주의는 아마 겉으로 보는 시선에 취해 있는 탓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 기댄 사상과 관념에 오랫동안 휩쓸려온 탓이리라. 그런 사상적 경향으로 내가 늘 저울질하는 것은 유가다. 지금 보고 있는 저 대나무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 곧음과 그 곧음의 수직적 지향성을, 그리고 그 지향성의 고독을 상징으로 뽑아내는 것이다. 엑기스(하긴 이 말은 이 땅에서 쓰고 있는 영어 extract의 일본식 표기가 아니던가)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그것만을.
 
그리하여 그 상징은 피를 묻혀야 할 죽창으로 전화하기도 한다. 그런 죽창에서 민중의 이미지만을 끌어당기는 부류를 나는 경계한다. 그러나, 기억해두자. 그런 대나무는 실상 속이 텅 비어 있다. 겉으로 보는 자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경험에서 그 비어 있음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경험을 뛰어넘는다. 경험은 시간과 공간에 걸려 있는, 어느 지점에서 부자연스런 어떤 것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래도 마음이 무른 사람은, 시각적이긴 하지만, 대나무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을 동시에 본다(김훈, ‘악기의 숲, 무기의 숲’, “풍경과 상처”).
 
그러나 그런 분열되지 않은 시선조차 내게는 헐겁다. 내가 늘 경계하는 것은, 어떻게 포장해도 새어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냄새가 아니던가. 자신의 잔혹성을 교활하게도, 위선적으로 은폐하며 사실상 인육을 먹는 존재가 누구인가. 자기부정 없이는, 인간은, 내가 겪어온 한, 가장 위험하다. 죽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이 시대, 내가 겪어온 이 시대는, 죽어야 산다(누군가 다른 시대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물론 통일이 아닌 단지 자기부정에 있으리라.
 
그러나 이 자기부정조차 단지 수단일 것이다. 지금 나는 대숲을 보고 있다. 그것은 어떤 포장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것, 스스로 그러함, 자연일 뿐이다. 자연에 어떤 거짓이 있는가. 어떤 참과 거짓이 있는가. 선악이 있는가. 긍정과 부정이 어디 있는가. 오고 가는 것이 또 어디 있는가. 지금 나는 대숲을 보고 있다. 왠 말들이 그리 많은가. 그러나 그런 말들, 그런  말들의 세상을 떠올리자마자, 그것은 마치 침묵의 바다에 돌멩이 던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지금 대숲은 그저 봄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가볍게 흔들리면서, 맑게, 푸르게.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저 대숲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 우두커니 서 있는 대나무들로 이루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단지 부분과 전체, 부분들과 전체의 관계가 아니다. 각각의 대나무들이 각각이면서 대숲이 되고, 대숲이 다시 각각의 대나무들로 되는 것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뛰어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내가 내 삶에서 오류와 시련, 방황을 겪으면서 찾아온 것이 아닐까. 더구나 대숲은 땅바닥으로 긴밀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른바 이 시대의 담론이 되고 있는 그것을 기초로 하지만, 그것만으로 귀결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닐까.
 
내 가슴을 찌르는 그것은 무엇일까. 어느 땐가 그것을 나는 다시 떠올려 굴리게 될 것이다. 눈길을 거둬 봄의 맑은 하늘을 본다. 거기 믿음직한 대흥산이 누워 있다. 새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봄날이다. 비어 있는 듯도 하고 가득차 있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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