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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초

벼리 | 기사입력 2005/05/11 [08:03]

앵초

벼리 | 입력 : 2005/05/11 [08:03]
▲ 남한강변 한적한 숲에서 만난 앵초.     © 2005 벼리

이맘쯤, 올해는 봄이 늦어 예년 같으면 좀더 이르겠지만, 인적이 드문 숲 그늘에선 빛깔 고운 분홍꽃을 만난다. 봄꽃들의 입장 순서로 치면 이미 진달래도  지고 철쭉도 질 무렵이지만, 그 화색은 진달래꽃보다도 철쭉꽃보다도 훨씬 짙다. 그렇지만 타는 빛깔은 아니다. 덩치로 치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이 꽃을 '앵초'라고 부른다. 앵두꽃에서 따온 이름이 아닌가도 싶지만, 일본에서 쓰는 이름 '櫻草(앵초)'와 같아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의 식물자원을 조사했고 당시 이름을 이후 우리의 식물학자들이 대부분 차용해 쓰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식 이름을 우리말로 그냥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름이 뭐 중요하랴. 그저 '이 꽃'이면 내겐 족하다.
 
이 꽃은 작게는 한 두 포기, 크게는 수백 포기가 무리지어 꽃을 피운다. 몸집도 크지 않은 데다가 잎은 어린 배추잎 같고 뽀송뽀송한 솜털로 덮혀 있다. 그런 만큼 가녀린 꽃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 꽃은 문득, 문득 '외로움'이나 '혼자'와 같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 꽃은 자리하는 곳과 어우러져, 대개는 절묘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내게 이중적이다.
 
한 두 포기에 불과한 작은 무리일 경우, 제 몸집보다 훨씬 큰 바위 틈에 끼어 있거나 산개울 가장자리에 붙어 있듯 자리한다. 여름장마라도 닥치면 잎이 구르는 돌에 찢어질 수도 있고 아예 망가져버릴 수도 있다. 심지어는 난폭한 물살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큰 무리일 경우, 이 위태로움은 아주 빼어난 풍광으로 대체된다. 크게 무리진 이 꽃이 있는 곳은 예외없이 숲의 비밀이 담겨 있는 풍광을 보여준다. 그 빼어난 풍광의 한복판, 그 중심에 이 꽃이 하나의 무리로서 자리하는 것이다.   
 
이 절묘하다는 느낌은 마치 현(絃) 하나를 퉁겼을 때 감각에 불러들이는 날카로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날카로움은 시간의 운명-하나의 가녀린 존재가 커다란 무리로 등장하기까지 겪어야 하는-을 전하는 내밀함을 동반한다. 그 과정은 소멸과 비애로 가득한 운명적인 것이리라. 그 종국적 결과인 여럿으로 무리지을 때조차 외로움, 그 혼자는 아른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이 꽃을 같은 키로 대하면 두 가지 이미지가 스치기도 한다.  하나는 작은 귀와 그 밑으로 흘러내리는 짙은 머리칼이 만나는 곳에 들국화꽃을 꽂은 '소녀의 얼굴'(그녀가 어린이든 어른이든 상관할 필요는 없다)이다. 모양으로 그런 꽃을 꼭 빼닮은 탓이다. 그렇다, 이 꽃은 내게 '분홍들국화꽃'(고유명사처럼 들린다)이다.
 
또 하나는 '음부'다. 하긴 꽃이란 생식기관의 원형이 아닌가. 이 음부는 자그만하고 또 다른 음부들과 어우러지는 속성이 있다. 게다가 빛깔 고운 분홍빛 아닌가. 이 작은 분홍빛 음부, 음부들은 따라서 관음증이나 성급한 섹스욕을 불러일으키는 따위에는 전혀 속하지 않는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마음이 움직일 때 나는? 인간이 아니다. '식물'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어떤 꽃도 제대로 와닿지 않으리라. 아직도 내가 철저하게 버리지 못했다고 절감하는 인문주의도 그러할진대, 자연에 과학을 붙이는 그런 계산법으로 어찌 꽃과 만날 수 있으랴. 그런 눈, 그런 세상에 나는 불만이 많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불만의 소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로-지금-여기에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것은 이 꽃과 나란히-더불어 그냥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다. 연두빛 가득한 숲 그늘에 앉아 눈에 가득, 가슴 가득 이 꽃을 품는다. 품으면서, 나즈막하게, 속으로 속으로 말한다.
 
(내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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