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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

벼리 | 기사입력 2005/05/19 [00:40]

가벼움

벼리 | 입력 : 2005/05/19 [00:40]
▲ 자유로운 비상의 채비를 마친 할미꽃 씨앗. 생명의 씨앗을 껴안을 들과 산,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     © 2005 벼리

뭔 얘기만 나오면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붉은 핏줄이 비치는 그 표정만큼이나 톤이 높고 강변에 가까운 메시지를 던진다. 설령 그 메시지의 일부에 바람, 풀, 구름, 어린이, 사소한 것과 같은 가벼움이 끼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녹아든 게 아니라 끼어 있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존재의 언어가 아니라 당위의 언어인 탓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을 대하는 데도 너 아니면 나, 동지 아니면 적의 이분법이 마치 공중에 떠서 사냥감의 급살을 겨냥하는 매처럼 날카롭다.
 
언뜻 다가오는 그 표피의 심각함과 무게만큼이나, 그러나 그 속은 허탈한 공허로 가득 차 있다. 이 엇갈림은 '부박함'이란 말이 잘 어울린다. 적어도 삶에서 입보다 귀를 소중히 하고, 그 귀조차 가려듣기도 하고 때때로 시냇가에 나가 씻을 줄 아는 결백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핏대를 올리는 그 표정과 그 귀결이 얼마나 부박한지를 실감한다. 말하기의 '이전', 드러내기의 이전, 아니 까발리기의 이전에 대해서 그 부박한 무리들은 알뜰살뜰 아니 잠시라도 전혀 품어본 적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 표피적인 발상들, 언어들은 실은 파편화되고 단편화된 흉한 몰골이다. 이것이 부박함의 정체다. 하긴 요즘 시대가 그렇다. 그들은 그런 시대를 닮아가기에 바쁘고 그것이 흉한 몰골로 비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쏟아내기에 바쁘다. 그래 그들은 늘 세상이 따라잡고 배우고 익히기에 바쁜 무엇일 뿐이다. 그들에게 주인은 그들 밖의 세상이지, 자신이 아니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통탄할 수도 있고, 덜 민감한 사람조차 사태의 추이를 주시한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표피적인 발상과 언어를 시대는 요구하고 그 얼치기 같은 광대들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라. 그 아득함 속에 구름은 얼마나 자유롭고 그 푸르름 속에서 구름은 얼마나 하얀가.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그 하늘의 무게 속에 새는 얼마나 가볍고 그 하늘의 광활함 속에 새는 향하는 그 길이 분명하지 않더냐. 결코 표피적일 수 없는 그 존재의 깊이를 가슴으로, 가슴으로 느껴보라. 그것은 사실은 한 점 티끌도 되지 않는 제 몸의 무게를 구리동상의 무게로 증폭시키면서까지 땅을 내리누르는 아집과 오만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다.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무게들을 제대로 버텨내지도 못하는 그 무게를 단지 제 무게의 무기로만 삼아서는 결코 흘러가는 구름을, 하늘을 나는 새를 볼 수 없다.
 
시인 황동규가 이렇게 들려준다. “무작정 떠 있다/멍텅구리배./오늘은 흔들리지도 않는다./허리 근질거림 참다보면/바다에 떴는지 하늘에 떴는지/열(熱)에 떴는지.” 멍텅구리배가 바다에 떴는지, 하늘에 떴는지, 열(熱)에 떴는지 구분되지 않는 그 가벼움을 어떻게 맛볼 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무작정 떠 있다는 바로 무중력의 비움 없이는 그 가벼움을 맛볼 수 없다고 내밀한 톤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냥은 그 가벼움이 스며들지 않는다. 안과 밖,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부지런함이야말로 가벼워지기 위한 필수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몸을 비워내고 풍만하게 채운 그 가벼움이 바람을 만나면, 제 멋대로 부는 바람을 만나면 자유롭게, 자유롭게 비상하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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