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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촌에서

벼리 | 기사입력 2005/05/25 [04:32]

퇴촌에서

벼리 | 입력 : 2005/05/25 [04:32]

▲ 풍경 속 할매가 지어내는 풍경은 어떤 것일까.     ©2005 벼리

오후의 끝자락. 해를 등지고 강을 따라가는 산들은 빛과 그늘(어둠)이 부딪치는 소란을 겪고 있다. 시간의 삶이란 늘 그런 것 같다. 이 때문에 빛보다 그늘이 더 짙게 깔리고 있지만, 그늘보다는 빛이 더 잘 눈에 들어온다. 강도 산들을 따라 흐르고, 흘러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아득하여라!
 
강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서 있다. 그러나 나무들은 서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에서만이다. 나무의 삶으로, 그 삶의 언어로는, 나무들은 풍성한 연두의 엽의(葉衣)를 애틋하게 뒤집어쓰고, 강가에서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말없는 짐승처럼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강가에는 시간과 더불어 강물이 퇴적시킨, 긴 작대기 같은 작은 사주(砂洲)들이 뻗어 있다.  흐르는 강이 강이라면 그것은 강 위에 흐르는 또 하나의 강으로 보인다. 마치 강 스스로가 만든 상처 같다. 그러나 그곳엔, 온통 5월의 풀들! 그 투명한 빛의 무리는 완벽하게도 적의없는 점령군이다.
 
그 푸른 풀밭엔 얼마나 많은 물새들이 둥지를 틀었을까. 문득 미약하지만 강렬한, 어떤 기억의 소리가 떠오른다. 어릴 적 기억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끝내 사라져버린 그 소리는 뜸부기 소리다. 저 5월의 풀밭에 기억의 뜸부기가 찾아 왔으면 참 좋으리라.
 
강 풍경으로 빠져 들어가자 마침내 그 자연에 기댄 삶터가 전경화(前景化)된다. 강물을 끌어들여 방금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다. 그래, 이 삶의 터전들, 우리네 뿌리 깊은 삶의 터전들은, 더구나 지금은 땅과 농촌의 현실로 인해 상처로 와 닿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냐.
 
그 논들을 더듬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뜬모를 내고 있는 늙은이를 만난다. 만남이란 순간적이지만 종종 강렬하다. 그래, 젊은 것들은 다 어디 가고! 풍화되는 현실과 그 현실에 위태롭게 선 삶의 풍경, 게다가 그것이 시대의 어긋난 인위에 의한 것이라면 언제나 서글프다.
 
그것은 핵심에서 죽음의 풍경이 아닌가. 익숙한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는 할매의 모습은 가슴을 찌른다. 내 삶이 그렇듯이 내 삶에 들어오는 다른 이의 삶도 아플 때가 많다. 운명적이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늘 바라는 것, 그것은 단순한 말하자면 자연에 조화로운 풍화의 풍경을 그리는 일이다. 그것은 설령 죽음이라도 해도 물처럼 담담하고 심지어 즐겁기까지 한 풍화의 풍경을 꿈꾸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면서도 더러 나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보여지는 것에서 보는 것만을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더라도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자유롭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만 할매가 지어내는 풍경은 목가적으로 다가온다.
 
(돌아오는 휴일에는 그녀와 아이들을 더불어 시골 처가에 내려가 서툰 모쟁이 노릇이나 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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