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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터널

벼리 | 기사입력 2005/05/25 [04:46]

인간터널

벼리 | 입력 : 2005/05/25 [04:46]
▲ 인간터널. 1번 국도 한수 이북 서울의 관문에서.     © 2005 벼리

민족, 민중, 민주, 계급과 같은 큰 개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한 시대가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독재, 군사정권, 탄압이라는 역사적 실체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소생의 지역적 뿌리가 한수 이북인지라 그 시절에는 혈육을 만나고 선산에 갈 일이라도 생기면 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군사적 시설물들이 매우 낯설게 다가오곤 했다. 그 시설물들의 기호작용이 본래 담당해야 할 군사적 의미보다는 뒤틀린 정치적 의미가 앞서 달려든 탓이었다. 심지어 총을 든 병사를 봐도 종종 분노감 같은 것이 일기도 했다. 모두가 불행했던 시대였다.
 
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한수 이북 서울의 관문 쯤에서 역시 늘 보아온 군사적 시설물을 만났다. 현대판 성채와 같은, 높고 두툼한 옹벽이다. 그것은 내 기억에 수십년 동안 아무런 모습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우거진 담쟁이덩쿨로 뒤덮혀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이로 또렷히 보이는 무채의 옹벽이 분단의 오랜 시간을 떠올리게 했고 육중한 실감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나 그 시간의 무게는 내가 겪었던 그 어긋난 시대에 낯설게 또는 분노로도 읽혀지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와 닿아서 새삼 시대의 변전을 실감했다.
 
그런 감회에 젖고 있을 무렵 우연히 성채 모습을 하고 있는 그 군사적 시설물 인근 인도에 전에 없던 '인간터널'을 발견했다. 왜 이것을 설치했는지 느낌은 있지만 자세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름을 인간터널로 불렀듯이 누구도 이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통행은 불가능하다. 이 터널은 인도를 다 차지하고 있었고 도로 양편 모두에 설치되어 있었다. 누구도 거치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이 인간터널은 내가 실감있게 느끼는 시대의 변전에 반동하듯 달려드는 그 무엇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것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인간안보'를 위협하는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초로의 늙은이가 이 인간터널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남북간의 뼈아픈 전쟁을 겪은 세대에 속한다. 왠지 무거워 보이는 그 늙은이의 발걸음에 나도 따라 무거워졌고 또 심한 답답함이 몰려든다. 운명처럼 그 늙은이가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자 시대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어난다. 이럴 때, 나는 한 가지 저항을 시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인간터널을 비껴 그 옆의 차도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 속이 시원하다. 그러나 돌아보는 순간, 그 인간터널은 역시 여전히 그 자리에 '딱!'하니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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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픔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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