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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봄 아쉬워

벼리 | 기사입력 2005/05/26 [20:25]

가는 봄 아쉬워

벼리 | 입력 : 2005/05/26 [20:25]
▲ 지난 4월 남한산에 산벚이 활짝 피었다. 바람이 불자 흩날리는 꽃이파리들! 눈은 청맹이 되고…….     © 2005 벼리


' 봄 좋아하세요?'

만약에, 만약에 누가 내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틀림없이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리라. 틀림없이 상대가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훨씬 나이 먹었다고 할지라도  티 없는 소년소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고 믿게 되리라. 그 물음에 너무, 너무 행복에 겨워 설령 내가 봄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게 되리라.
 
' 정말 좋아해요.'

그 질문에 이렇듯 내가 벅차듯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 물음이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란 말은 마치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사람의 발견'이란 의미 맥락에서다. 아직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그 무엇으로 살든 또는 어떻게 살든 그래도 이런 물음은 가끔 잊지 않고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믿는 나로선 내가 남에게가 아니라, 남이 내게 그런 물음을 던져주길 원한다. 그러나 기억에 그런 물음을 나는 받아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늘 달리기하듯 살아서다. 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봄을 좋아한다. 봄을 탄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마흔 중반에, 종종 찾아드는 '늙는구나!'라는 느낌이 별 거북스럽지 않는 그런 사내가 봄을 탄다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는 유별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유별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로선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렇게 살아왔음으로. 돌이켜보면 천연성품이랄까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그것을 그다지 잃지 않았으니, 늘 빌빌대는 삶이나 그래도 실패한 삶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봄날이 간다. 봄내 가볍게 노닐던 숲은 벌써 우거져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기 시작했다. 한낮에는 더운 육질의 숨결도 뿜어내 물가가 그립기도 하다. 그냥 보낼 수야 없다는 생각에 올해 지내온 봄에서 말 하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거둬들인다. 그저 느낌에 그것은 '변화'라는 말이다. 봄을 잘 의미짓는 말로서다.

변화라는 말의 의미를 농담(濃淡)과 세밀함으로 드러내고 실감나게 하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게다가 변화를 보여주는 봄의 사물들은 저마다 제각각이어서 무엇을 대하더라도 존재와 존재의 마주침을 일으킨다. 다른 계절 역시 나름의 방식과 모습으로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봄만 하지 않다. 봄은 더구나 생장의 처음이어서 마치 시공간 압축을 보여주듯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사람으로 치면 맑고 쑥쑥 자라는 어린애들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언 땅을 뚫고 솟아난 뾰족한 새싹에선 그저 놀란 표정을 짓게 된다. 그 엄청난 변화로 인한 놀람은 삶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하고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삶을 돌아보게도 한다. 깊은 침잠의 내공을 갖춘 사람이라면 말 밖의 경이로운 세상으로 인도되는 계기를 맞아들이기도 한다. 움이 튼 지 날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새싹은 벌서 줄기와 잎의 완연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어떤 경우들에는 벌써부터 꽃이 변화의 절정으로 만개하거나 이미 벌써 바닥에 황망히 누워 있기도 하다. 이런 경우들 역시 깊은 느낌과 사색, 또 어떤 깨침을 불러일으킨다.

봄이 드러내는 변화, 종종 극적이기도 한 변화들에 감응하는 사람 역시 따라 변화한다. 그런 순간들, 그런 체험의 공간에서는 누구나 맑을 수밖에 없다. 맑고 맑아서 세상사에 무욕하다! 충돌음이 나는 어떤 견해도 세울 수 없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 완벽해서 바늘구멍 하나 틈이 없다. 이런 상태의 절감이야말로 행복이 아닌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도 가지가지이겠지만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 이런 체험은 확장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장자가 들려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있다.

" 행복은 새의 깃털보다 가볍지만 사람들이 거둬들일 줄 모른다(福輕乎羽 莫之知載)'(莊子, 人間世)

이런 맥락에서 사람의 삶을 고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는 사고, 그런 사고를 드러내는 작업들 예컨대 전기, 영웅 만들기, 스타 만들기 따위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판박이처럼 찍어내고 써대는 숫한 책들, 글나부랑이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규범적인 틀 아래 삶을 짜맞추고 따라서 실제 삶의 변화를 구속할 뿐이다. 삶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산송장이 되는 그 무엇일 뿐이다.

이런 태도에서, 세상에서 흔히 보이는 것인데, 사람들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투로 말하는 것을 나는 지독할 만큼 경계한다. 사람들에게 비쳐진 누군가의 삶의 모습이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보는 자의 눈이 짧거나 상대가 드러내지 않는 탓이기도 하지만 요즘 세상의 인물에 관한 세평이란 것이 주로 매체에 의해 매개(媒介)된 것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남에게 눈에 띄든 띄지 않든 누구나 자기 삶의 모습이 없지 않다. 게다가 누구나 삶이 변화하는 계기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나는 설령 세상에서 단죄받은 사람일지라도, 그 삶을 결코 가볍게 볼 수가 없다. 하물며 매개의 방식으로야!

모든 사물과 현상이 그렇듯이 변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 자체가 아닌 목적이란 다 조작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는 따라서 삶을 유예하는 것은 결코 변화일 수 없다. 거리낌 없이 늘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변화와 더불어 놀고 그 놀이에서 자기 삶의 변화를 즐길 수 있을 때, 그것을 인문주의투로 '희망'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봄이 그렇다. 봄이 아주 뚜렷이 보여주는 변화, 그 변화에서 나는 희망을 발견한다.

아아, 아쉬워라, 가는 봄이여! 먼 산의 뻐꾸기 소리는 자취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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