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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과 경계

벼리 | 기사입력 2006/07/17 [00:42]

진흙탕과 경계

벼리 | 입력 : 2006/07/17 [00:42]
▲ 박쥐는 새처럼 날게 되었다. 그러나 박쥐는 새가 아니다. 박쥐는 다만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선택하는 순간 그 길은 필연이었으며 필연의 길은 냉철한 법이다. 사진 출처 http://en.wikipedia.org     © 성남투데이

술을 마신 끝이라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띄었다. 오늘은 술이 좀 과했나. 문득 그녀가 말했다. 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이 깨졌다.

“나는 진흙탕에 살고, 당신은 경계에 살지.”

한 동안 말없이 지낸 터라 오랜 만에 꺼낸 그녀의 한 마디가 뒤통수를 친다. 말없이 지내다가 불쑥 한 마디 던지는 것은 그녀 특유의 말 걸기. 대개 그녀가 술을 마셨을 때다. 그녀는 긴 말 하는 법이 없다. 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화살이 날아와 박힌 것 같은 그 지경에 처할 때 내 반응이란 파안대소, 대꾸, 항변, 침묵, 도망가기, 아이들 붙잡고 딴청부리기 등등. 어떤 수로 대응해도 돌이켜보면 호랑이 앞에 여우 아니면 토끼.

만감이 교차한다. 최근 생활에 지쳐 버거워 하는 그녀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 탓이다. 하긴 가족경제의 중심에 선 그녀의 어깨는 요즘 와서 특히 무겁게 느껴진다. 침묵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침묵이다. 그나마 회피하지 않고 그녀가 잠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있기로 마음먹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녀가 잠자리로 돌아갔다. 차를 끓인다. 알 수 없는 생각의 길, 그 길 아닌 길에도 어둠이 짙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의 수레바퀴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구른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바람의 기운. 쏜살같이 뭔가 지나간다. 무얼까. 약간의 시차가 지나자 또 다시 지나간다. 박쥐. 박쥐다. 새도 아닌 그렇다고 기어다는 것도 아닌. 그녀가 나에게 경계에 산다고 말했던 탓이다!

존재의 이중성, 박쥐의 운명이다. 한쪽에선 ‘저 놈은 기어다니는 것이 아닌 새야’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저 놈은 새가 아니라 실은 기어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어느 쪽에서도 박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취급한다. 따돌림, 냉대, 아니 늘 문전박대. 이중적인 존재. 박쥐는 종종 서글픈 기분에 휩싸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존재의 이중성은 실은 비존재의 이중성이다. 존재란 늘 완전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반쪽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다. 어떤 존재도 완전하지 않다. 박쥐는 그것을 안다. 박쥐는 그것에 격노했다! 박쥐가 기어다니는 세계에서 탈주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박쥐 스스로 초래한 운명이다.

박쥐의 삶은 그 어느 쪽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 기어다니는 세계, 날아다니는 세계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두 세계의 경계에서만 박쥐는 삶을 살아낸다. 그러나 그 경계는 반쪽과 반쪽이 만나는 접점이라는 점에서 완전하다. 경계의 삶은 완전한 것이다. 완전한 존재를 이루는 곳이다. 그것은 아마 새로운 온전한 존재의 양식일 것이다. 박쥐는 그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경계는 늘 부딪침이 끊이지 않는다. 그곳은 전쟁터다. 이 전쟁터야말로 박쥐의 세계다. 포염 속의 삶, 그 치열한 삶! 박쥐의 삶이다. 박쥐는 가끔 되묻는다. 온전한 삶은 전쟁터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박쥐는 낮이 아닌 밤에 날아다닌다. 부엉이가 필요에 의해 밤으로 나는 것과는 다르다. 기거하는 곳은 따스한 볕이 비치는 숲이 아니다. 어두컴컴한 동굴이다. 기어 다니는 것들은 기어 다니므로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숨은 박쥐를 실은 알지 못한다. 날아다니는 것들은 낮으로 날아다니므로 밤으로 나는 박쥐를 실은 알 수 없다. 

기어다니는 것들도 새들도 박쥐를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박쥐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박쥐가 따돌림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그 냉대는 본 것에 기초한 것, 아는 것, 따라서 현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가상, 신화에 기초한 것이다. 그 기상과 신화가 인간의 의식을 감금하려는 가상의 조작자, 신화의 기술자에 기초한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녀사냥이다!

박쥐의 눈은 단지 흔적이다. 네 발 역시 허공에 매달려 있기 위해, 날기 위한 도약을 위해, 날기 위해 있을 뿐이다. 날개도 실은 날개가 아니다. 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어 다니는 것 가운데 새처럼 날고 싶었던 유일한 존재. 그리하여 온몸에 기어 다니는 것의 흔적들을 남기면서 마침내 새처럼 날게 된 유일한 존재.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졌다. 꿈은 현실이 되었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상은 현실이 되었다.

박쥐는 새처럼 날게 되었다. 그러나 박쥐는 새가 아니다. 기어다니는 것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존재! 그러나 밤으로만 날아다니는 존재. 밤으로 날아 결코 새가 알 수 없는 존재! 누가 박쥐는 행복할까, 불행할까라고 묻는다면? 그러나 이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문일 것이다. 박쥐는 다만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선택하는 순간 그 길은 필연(선택은 우연이 아니다)이었으며 필연의 길은 냉철한 법이다.

그럼 그녀가 말한 진흙탕 곧 어느 반쪽의 세계에 속한 삶은 어떠할까? 그것은 아마 진흙탕에 빠져 험하게 굴러본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으리라.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하기 어려우리라. 경우에 따라선, 드물게, 진흙탕과 경계를 동시에 보는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그녀의 말이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디에 속해 있든 따라서 어디에 속하지 않든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가 직절한 길이 아닐까 싶다. 경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흙탕에서도 어떤 삶을 살아내느냐갸 직절한 길인 듯 싶다. 이런 관점이라면 진흙탕에서 살면서도 진흙탕에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훨씬 힘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고보니,

박쥐도 별 거 아니다. 어둠과 함께 박쥐가 사라진다. 여명이 밝아온다. 운명이란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모든 운명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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