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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예술

벼리 | 기사입력 2006/08/14 [01:11]

삶의 예술

벼리 | 입력 : 2006/08/14 [01:11]
▲ 구멍 안에 뭐가 보인다. 문제는 구멍이다. 복정동에서.     © 2006 벼리

길을 가다가 길 위에서 길을 물은 적이 있는가? 무엇을 물었느냐? 
 
들녘을 지나다가 끼욱끼욱 기러기 떼 날아가는 구만리 하늘. 가던 길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느냐? 무엇을 보았느냐? 은가루 수북이 쌓인 아침,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한 마디 외쳐본 적이 있는가? 무어라고 외쳤느냐? 봄숲에 스며 곰마냥 어슬렁거린 적이 있느냐? 노란 꽃구름인양 송화가루 날릴 때, 어디 마른 기침 몇 번 내본 적이 있느냐?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 귀 기울여 문득 무슨 소리 들리더냐? 못가에 홀로 앉아 물에 비친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느냐? 울었는가, 미소 지었는가? 개울물에 멱을 감으며 물을 알겠느냐? 물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어떠하겠느냐? 무너진 옛집을 지나다가 그 뜨락엔 떨어진 꽃잎 수북한데 너는 우두커니 서서 무엇을 보느냐? 한여름 울긋불긋 길거리에 핀 부용화, 바람에 나불거리는 그 큰 꽃들은 대체 얼마나 큰 슬픔들이냐? 목욕을 하다가 거기 흰 털이 희끗희끗 보일 때, 문득 육신은 어디로 가고 있더냐? 어디서 왔더냐? 그 때 여윈 몸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문득 뒤통수가 깨지더냐? 헉헉거리는 암캐마냥 더위 먹은 날, 문득 찾아드는 가을은 어느 찰나냐?

10대 때, 자신의 창녀생활을 속죄한다고 장애인을 남편으로 섬기면서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곤 했다는 얘기를 남한산성 지수당 옆에서 커피 파는 아낙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녀의 남편은 휠체어에 앉아 천연덕스럽게 지수당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떤 그림이냐? 어떤 소리냐? 잠시 일산에 살 때 저녁노을이 질 무렵 김지하 선생이 정발산을 감아 도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그 때 내가 눈으로 본 것은 무엇이더냐? 며칠 전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 차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타리 한복판, 배낭을 베개 삼아 낮잠 자는 늙은 거지를 눈여겨 본 적이 있다. 무엇을 보았겠느냐? 내게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늦은 밤 생각하다가 피곤해진 두 눈을 쓰윽 훔쳤다. 이 광경은 어떠하냐? 3년째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아버님을 찾아뵙자 수염을 깍지 않는다고 나무라시곤, 피우지 않는 담배라며 한 갑을 내게 던지셨다. 무슨 뜻이냐?

장대 같은 비 줄창 쏟아진 뒤 안개구름 나지막이 한참을 구물거리더니, 안개구름 흩어지고 드러난 갈매빛 남한산. 눈에 온통 남한산! 누가 말한 것도 같다.

‘물에 비친 달, 달에 비친 산수’
 
  • 高度
  • 슬픔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 無題
  •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 이것은 神이다
  • 몽골 초원에서
  • 계란으로 바위치기
  • 어떤 사소한 즐거움
  • 조롱
  • 근조 서민경제
  • 봄날에
  • 성불사
  • 남한산에서
  • 紅一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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