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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들 이름, 좀 그래

〔문화/하다말다〕이 시장이 공약한 공원들의 ‘이름’

벼리 | 기사입력 2006/08/22 [23:15]

공원들 이름, 좀 그래

〔문화/하다말다〕이 시장이 공약한 공원들의 ‘이름’

벼리 | 입력 : 2006/08/22 [23:15]
‘화합의 광장’? 상투적이야!

이번 5·30 성남시장 선거 당시 이대엽 시장은 시청사 옮겨 짓겠다는 여수동 일대에 ‘피닉스 파크 및 화합의 광장’을 조성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먼저 ‘화합의 광장’부터 그 이름을 살펴보자.

민선3기 당시 이 시장은 여수동 일대에 실제로는 비까번쩍 ‘신청사’의 뻥튀기인 ‘행정타운’을 짓겠다고 나섰다가 큰 홍역을 치렀다. 극심한 반대여론 때문이었다. 이 여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반대여론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나 보다. 여수동에 ‘시민화합을 위한 대규모 공원’을 만들겠다고 들고 나왔다. 이 소리도 실은 남의 것을, 그것도 취지는 무시한 채 일부만 슬쩍 베낀 것이다.

당시 재개발범대위의 신영수 상임대표는 시의회 주최 의정포럼에서 “행정타운 자리는 성남의 도시삼색화를 방지하고 각 시가지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한마당과 같은 곳이어야 한다”며 “각 시가지 주민들이 모여들 수 있는 문화예술, 생활체육, 광장, 휴게, 상업 기능을 확보해 성남의 구심으로 만들자”고 발언한 바 있다.

이 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 성남의 고도제한 마지노선인 45m에 이르는 웅장한 시 상징물을 세우겠다고 들고 나왔다. 물론 시민화합을 위해서란다. 이 웅장한 상징물은 결국 닭짓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번 성남시장 선거에는 상징물 대신 광장을 들고 나왔다. ‘화합의 광장’이란다. 공원에서 상징물로, 상징물에서 광장으로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그간 행정력, 시민의 혈세, 시간만 낭비하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원위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역시 ‘시민화합’을 위해서!

제 자리로 돌아왔어도 그 놈의 ‘시민화합’이란 소리만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아예 이름까지 ‘화합의 광장’이라 지었다. 이쯤 되면 시민화합이란 말은 상투어가 되어 버린 셈이다. 대개 이런 존경할 만한(?) 상투어는 대화를 봉쇄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법이다.

신동엽 식으로 해독해보자. “껍데기는 가라. 시민화합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

▲ 파리공원. 서울 강서구 목동 아파트 단지 상업지구 내에 있는 만 여평의 달하는 공원이다. 서울의 명소로 꼽힌다. (사진출처; encyber.com)     © 성남투데이


피닉스! 불사조공원? 완존 코미디!

여수동에 ‘피닉스파크’(phoenix park)라니? ‘불사조(不死鳥)공원’이라니? 상상력 대단하다 싶었다. 피닉스! 피닉스는 그러나 고대 이집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 비록 차용한 것이나 그래도 참신한 발상이다 싶었다. 시장선거 때 어찌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피닉스(phoenix)가 ‘피크닉’(picnic)으로 바뀌었다! ‘불사조’에서 ‘소풍’으로, 불사조공원에서 소풍공원으로! 이대엽 시장이 민선4기 수장이 되고 나서다. 이번 시의회에 제출한 ‘2006년도 주요업무보고’에도 이렇게 나오더라.

소풍공원? 그럼 선거 때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얘기? 이거 책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님, 선거 때 ‘코미디’ 했나?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허위사실보단 코미디가 맞는 것 같다. 하긴 누가 이 시장보고 찍었나? 공약이나 보고 찍었나? 예선이 본선이고, 그놈의 한나라당 바람인지, 정권심판 바람인지 왕창 불어 거시기하게 찍었지.

이왕 바꾼 거, 소풍(逍風)의 순우리말인 나들이로 바꾸면 어떨까? 그렇다고 꼭 바꾸자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도 소풍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는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 찐 계란, 칠성사이다, 몇 봉의 과자를 배낭에 넣고 장충단공원으로, 남산으로, 창경원(창경궁)으로 걸어서 걸어서 소풍가던 그 아득한 소시(少時)의 추억!

참고사항. 소풍공원은 서울시가 원작자다. 서울시 푸른도시국의 한 관계자는 소풍공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가족단위 나들이나 각종 모임, 보물찾기를 하면서 소풍 나온 느낌을 받게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 공원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밀리언파크? 그 의미부터 헤아리길!

밀리언파크(million park). 우리말로 ‘100만 공원’? 영어마믈 바람이 불었는지 왜 자꾸 영어로 이름을 짓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공원이란 말까지! 아예 우리말 안 쓰기로 작심했나? 아무튼 이 100만이 성남의 인구수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쨘한 연애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백만 송이 장미꽃’에 비하면 솔직히 삭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정구 태평동 삼정아파트 앞에 조성하겠다는 이 공원이 공약으로 등장하게 된 유래는 이렇다. 지난 2005년 11월 8일 이대엽 시장이 관계국장에게 지시했다. 뭐라고? “우리시 인구가 100만이 되는 날자(2006년 ○월 ○일)를 보고하도록!”

왜? 이 시장 말에 따르면 “2006년도는 인구 100만을 돌파하는 우리 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해”이기 때문이다. 밀리언파크는 곧 성남의 인구 100만 돌파 기념을 위해 조성하는 공원이다! 이번 주요업무보고에도 그렇게 나온다. 문제는 인구 100만 돌파가 대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우선 이 시장이 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릇 사람이란 계기를 필요로 하는 동물이며, 계기마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계기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 계기를 구체화하는 활동 또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런 오래된 습관은 시간적·공간적 변화에 적용되어 오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 밀리언파크를 조성하겠다는 것은 100만이란 숫자의 의미를 그 외의 숫자와는 다르게-특별하게 만들려는 지극히 단순하고 순진한 의도인 셈이다. 적어도 이 시장의 이런 순진함에 대해서는 뭐라 할 생각이 없다. 남들도 그런 습관이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까지다.

왜냐하면 이 시장은 성남이란 도시를 이끌어가야 할 시장으로서 단순히 순진하기만 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인구 100만 돌파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 시장의 생각은 어떠한가?

과연 인구 100만에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혹시 2000년 도래와 함께 일어났던 ‘밀레니엄 담론’을 알고 있는가? 그 담론의 의미, 양상을 이해하고 있는가? 혹시 밀리언파크는 그 밀레니엄 담론에서 별로 좋지 않은 것들만 모방한 것은 아닌가? 가령 밀리언파크라는 공원 이름! 한 때 전국언론의 소란거리로 등장했던 그 거대한 기념물 사업!

분명한 것은 성남에서 인구 100만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란 성남의 미래, 특히 그 조감도와 무관할 수 없다는 점. 이 조감도가 이 시장 개인의 사견이나 사감이 아니라 성남사람들의 살아 있는 의견, 욕구, 염원이 담긴 조감도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생각, 이 시장은 해보았는가? 아니 지금 민선4기 조감도나 있나?

한 가지 실마리는 있는 것 같다. 이 시장이 “인구 100만 돌파는 우리시 역사의 한 획을 긋는다”고 했을 때 그 ‘역사’다.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모두 다인가? 아니면 그런 시간들의 의미인가?

인구 100만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는 이 시장이 말한 역사와 내가 말한 조감도를 연관시켜 볼 때 구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양이 아니라 질의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첫째, 지난 성남의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지역살이의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성남은 타율과 리더들(?)의 ‘속 좁음’ 또는 ‘생각 없음’으로 ‘주체할 수 없는’ 인구 100만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동시에 우리 세기의 특징으로 예견되는 ‘작지만 특별한 것’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거대한’(macro) 것이 아니라 ‘작은’(micro) 것! 인구 100만이라는 그 양적인 크기에 눈 맞추지 말고 그에 맞는 도시와 삶의 질을 만들고, 가능하다면 여러 의미있는 사회적 척도들에 따라 세분화된 질들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시가 밀리언 파크에 조성하겠다는 ‘100만 상징조형물’은 재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거대한 기념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시가 이번 주요업무보고에서 밝힌 대로 “인구 100만을 기념해 웅비하는 성남을 상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웅비하는 성남’, 고인이 된 오 시장이 이 말을 참 좋아했다. 그는 전형적인 개발주의자였다.

웰빙대공원? 대체 무슨 웰빙인고?

공원은 공원인데 월빙대공원? 웰빙(well-being)이 대체 뭔데?

물론 어휘의 의미로나 또는 깊이 있는 사유 속에서는 웰빙은 좋은 말이다. 복지, 안녕, 행복이란 의미이자 몸과 정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유기체적인 삶 또는 그 문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온전한 삶이나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 웰빙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웰빙은 역사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 산업 고도화에 따라 발생한 특수한 형태로서의 삶이나 문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에 취한 결과 오히려 유기체적인 삶이나 문화의 훼손이 심각하다는 저항과 반성으로부터 나왔다.

80년대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에 이어 90년대 초 슬로비족(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 보보스(bobos)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런 웰빙이 21세기에 들어와 한국사회에서는 대중화(?)되고 있다.

문제는 문화산업에 포획되어 신드롬 곧 병동화(病棟化)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어 몸의 표상작업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몸의 이미지화’곧 ‘몸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다. 중요한 것은 그 변질의 의미가 신체 건강, 살빼기, 다양한 외적 치장에 치우쳐 있고 또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에 작가 김태헌과 함께 한 작업 『1번국도』라는 책에서 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명제 식으로 ‘몸이 웰빙함으로써만 존재하려고 한다’는 시대의 상황을 그 현장인 도시 공간 곳곳에 이미지로 구멍내는 것에 착안, 한 걸음 더 나아가 몸 자체를 공간으로 파악해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 최초의 한번, 최후의 한번은 어긋나게 비틀어야 완성된다. 의미로서 사건으로서의 공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긋나게 비틀어야 해석된다. 공간으로서의 세계는 대상도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내가 살아 있음이다. 따라서 내 몸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느끼느냐하는 문제다. 양주(楊朱)는 “서로 다른 것은 삶, 서로 같은 것은 죽음이(萬物所異者生也 所同者死也)라고 말했다. 이 말을 “서로 다른 것은 몸, 서로 같은 것은 죽음”으로 바꿔도 전혀 틀리지 않다. 공간의 문제는 다른 몸의 문제가 된다. 다른 몸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웰빙은 스스로 공간의 덫에 걸린다. 다이어트, 외관의 사치, 몸의 즉자적 확장인 권력 그리고 역설적으로 청부살인, 자살사이트, 나아가 생명경시의 사회풍조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덫에 걸려 있다.

사례 예시까지 해가며 웰빙에 대해서 스스로 쳐놓은 덫이라고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유행하는 웰빙으로부터 내 몸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느끼느냐하는 것 달리 말해서 살아 있는 몸으로서의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방기하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웰빙대공원은 과연 어떤 공원일까? 요즘 유행하는-따라서 언젠가는 심각한 사회적 비판과 반성이 이어지고 따라서 그 유행도 끝나고 말 웰빙일까? 아니면 온전한 삶이라는 깊이 있는 사유에서 나오는 그런 의미의 웰빙일까? 암만 봐도 전자 아닐까 싶다. 웰빙을 “다양한 테마”로 선보이겠다고 시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곧 몸이니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구닥다리 같은 얘기인가? 아니다. 권력적인 의미에서 이름을 추구하는 맥락으로 끌어들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막 아니 쉽게 짓지 않듯이 공공시설로서의 공원을 조성할 때 그 실체나 기능에 딱 떨어지는 이름을 부여해보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전통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사주, 성명학 등에 의거했다. 최근 많이 등장하는 우리말 이름들은 자식의 사람다운 삶에 대한 부모의 사려, 염원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듯이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는 공공시설물의 이름도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공원에 주어지는 이름은 공원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한다. 물론 이 두 가지 핵심요소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파악된다. 무엇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느끼게 하는 이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름이 곧 몸(名體分離)이라 하던가. 그럼, 하나 제안하자.

‘화합의 광장, 피크닉파크, 밀리언파크, 웰빙대공원, 이름부터 재고하시라!!’

 *. 기사에 덧붙임 : 앞으로 공원에 대해서 시민의 머슴들인 시의원들, 시민사회의 각별한 관심을 촉구한다. 특히 구시가지에선 그렇다. 시각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남에 조성되는 공원들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장소성, 설계상의 기본개념, 살아 있는 실체로서의 공간의 의미, 그 공간에 채워지는 소프트웨어의 성격, 미학적인 문제, 조성 후 각종 시설의 개악이나 침범·과잉 등에 걸쳐 잘못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잘못은 주로 도시, 마을, 시민이라는 핵심적인 고민거리에 대해 문제의식이 빈약한 관료들, 설계가들, 업자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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