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하고도 더 들어간 면 단위에서 만들었다는 그 막걸리는 시쳇말로 ‘물건’이었다. “아니, 면 단위에서 이런 포스가 느껴지는 막걸리를 어떻게 만들었지?”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묻자 선배는 “이래 뵈도 이 막걸리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있었던 전통이 깊은 술이야.”하면서 뿌듯해했다. 술병 디자인도 간결하면서 예뻤다. 태어나서 처음 마셔 본 막걸리가 맛이 깊은데다 역사도 깊고 겉모양도 정갈해서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화제가 <나꼼수>로 옮겨갔다. ‘비키니 여성’에 대한 나꼼수 구성원들의 발언으로 말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선배와 나는 성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초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나꼼수 현상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각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주류 언론의 팩트 사장내지는 조작 상황에서 팩트의 위대한 승리, 촌스러운 권력에 대한 무지막지한 똥침(너무 거시기한가?), 너절리즘에 대한 조문…. 여기까지는 20년 지기 아니랄까봐 죽이 착착 맞아 떨어졌다. 안주 씹는 맛도 꽤나 상쾌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선배가 화장실을 다녀온 뒤 “근데 말야, 나꼼수 걔들은 수준이 떨어져!”하고 단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양반 좋은 막걸리 마시고 웬 수준 타령이야’하고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꼼수 구성원들은 실언을 무지 많이 해. 내뱉는 말도 너무 거칠어. 내용에 권위가 실리려면 거기에 걸 맞는 형식이 있어야 하는데 정제되지 않은 말로 하니 한계가 너무 뚜렷해!”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나꼼수 구성원들은 시쳇말로 ‘못 배워 처먹은 놈’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지적(?)이었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자니 동의하는 것이 되고 뭐라 말하자니 딱히 떠오르는 논리가 없고…. 나는 한동안 내 아지트 파리똥 즐비한 천장만 뚫어져라하고 쳐다보았다.(혹시 내 마음 속에는 선배와 같은 생각도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느닷없이 나를 구원해준 건 김지하의 <형님>이라는 시였다. ‘(형님) 있는 놈만 논답디까… 우라질 것 놉시다요…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 끼리끼리’. 이 대목을 인용하며 사설을 이어갔다. “나꼼수를 현대판 마당놀이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조선 봉건사회에서 억눌려 있던 아랫것들이 자신들만의 언어로 지배층을 향해 공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꼼수 팟 캐스트를 무려 6백만 명이나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마당놀이에 참석해서 얼쑤와 같은 추임새를 먹였다는 것이 되는 셈이고요. 마당극의 언어를 수준이하라고 하지 않잖아요? 나꼼수 언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테면 나꼼수는 팩타이어(fact+satire 합성어)로 봐야 제대로 보는 거 아닐까요?” 선배는 내 썰에 반만 동의하겠다고 했다. 더 이상 썰을 풀었다가는 날밤을 깔 것 같아서 어중간한 지점에서 나꼼수 현상에 대한 진단(?)은 막을 내렸다. 시시하고 조금은 걸쩍지근하게! ○…면단위 막걸리와 나꼼수!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 둘의 동류항은 무엇일까?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소프트웨어, 작은 것이 아름답다, 변방, 지역, 탈중심, <파랑대문>을 만든 김기덕 감독, 윤동주가 애타게 그리워했던 프란시스 잼이라는 시인, 아, 그리고 씨~바, 꺽꺽….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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