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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한명숙 ‘고칠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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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한명숙 ‘고칠 게 있다’

〔벼리의 돋보기〕 ‘사소한 비판’이긴 하지만

벼리 | 기사입력 2007/09/06 [22:10]

유시민, 한명숙 ‘고칠 게 있다’

〔벼리의 돋보기〕 ‘사소한 비판’이긴 하지만

벼리 | 입력 : 2007/09/06 [22:10]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집이란 단어의 의미, 그 의미의 크기를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이데거가 부여한 의미가 언어는 수단 이상의 것임을 간파하게 한다. 소통의 언어, 좋은 거짓말, 깨달음의 언어와 같은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의 언명이 옳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더구나 이런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의미 부여는 누구보다 그가 ‘존재의 철학자’라는 점에서 존재의 사유와 그 언어를 무의미한 잠꼬대로 만들어버린 마르크스의 천박한 언어관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이는 정보이론가들의 기술언어관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모든 언어가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대중매체들, 인터넷,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 오가는 언어의 실상은 사물, 사람, 그리고 관계의 보전과 고양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단절적이며 폭력적인지 드러낸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 아닌 존재의 감옥이라 부를 만한 사태다.

때문에 이런 언어에 대한 부정으로서나 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겨냥한 침묵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소통되지 않거나 지나친 의미의 무게로 짓눌린 언어 대신 소통과 직설적인 다른 언어적 표현으로서 가치 있는 행위나 미적인 예술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존재의 집인가 하면 감옥이기도 한 언어. 따라서 우리에겐 ‘전부일 수 없는 언어’라는 각성이 요구된다. 이 각성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끝까지 밀고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존재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나아가 전부일 수 없는 언어의 바깥, 그 깊고 풍부한 신세계를 체감할 수 있고 체인할 수 있다.

이런 관점과 태도에서 보자면 6일 자유토론 방식으로 진행된 MBC <100분 토론>를 빌어 펼쳐진 대통합민주신당의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 후보의 발언들에서 우리 몸에 거슬리는 두 후보가 있었다. 유시민 후보와 한명숙 후보다.

유시민 후보의 경우 경쟁후보들에 대해 ‘선배’라는 호칭을 자주 썼다. 이 선배라는 호칭이 조폭들이나 학연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나온 그 선배라는 호칭과 의미의 결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 학생운동권, 재야운동권과 같은 특정한 세계의 따라서 특정한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줄곧 비판한 정동영 후보에게 ‘의리’를 강조한 것을 볼 때 긍정적 의미에서 이른바 운동권 출신들의 의리문화 곧 동지애를 소중히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이 점에서는 외부의 패거리문화라는 어설픈 비난과 생각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곤경과 경우에 따라서는 생사를 함께 한 그들 내부에서 그쳐야 한다. 외부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유시민 후보는 우리 관점에서는 다른 어떤 후보보다 여러 세대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후보다. 분명 그는 다양성의 가치를 아는 후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장점을 대선경선 과정에서 잘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그는 앞으로 언어 사용에서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 싸가지문제에 대해 이날 사회를 맡은 손석희 교수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본인도 수긍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로 미뤄보아 아마 그는 고칠 의향이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고치는 것이다. 선배라는 호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의 사용은 운동권 출신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현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한명숙 후보의 경우 거의 모든 발언에서 ‘저’라는 주어를 빼뜨리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녀가 한 발언에 대해 책임성을 드러내는 어법일 수 있다. 그것은 흔히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예외가 아닐 정도로 자신을 정치상품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주어로 쓰는 그 상투성과는 다른 것 같다.

사실 그녀는 전직 장관으로서나 전직 총리로서나 다른 어떤 장관, 총리에 비해 별 문제가 없었고, 그 이전 그녀의 삶은 여성으로서도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토론에서 대의관계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소통관계를 강조하는 그녀의 발언은 인상 깊었다. 그러나 왜 그녀는 유별나게 ‘저’라는 주어를 쓰는 것일까?

그것은 ‘단일주체에 대한 환상’은 아닐까? 그녀가 발언하는 모든 것, 그녀가 행위하는 모든 것을 항상 ‘저’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가둬 두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대상화에 대한 환상’은 아닐까? 그녀와 분리될 수 없는 모든 것, 그녀가 따라야 하고 배워야 하고 따라서 그녀가 변신해야 하는 모든 것에 거리를 두겠다는 것은 아닐까? 설령 무의식일지라도 말이다.

임제 왈, 입처개진(立處皆眞)이기 위해서는 수주작처(隨處作主)하라 하지 않던가. 수주작처(隨主作處)여선 곤란한 일이다. 그것은 유권자들 앞에서 값싼 자기 호명을 통해 그렇고 그런 정치인으로 자신을 재생산하기에 급급한 저속한 부류로 빠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언어 사용을 둘러싼 사소한 비판이겠지만 두 후보가 귀를 기울이는 게 좋겠다. 현재로선 유시민 후보, 한명숙 후보 모두 대통합민주신당이 자랑으로 내놓을 수 있는 좋은 후보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너무 한쪽으로 치달은 사정에 대한 불만도 없지 않다. 물론 길고 짧은 것은 딱 부러지게 대봐야 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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