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요구와 일치하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서 그의 당선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승리가 아니다. 차라리 대선이라는 특정한 게임에서 그의 경쟁자들의 패배, 특히 참여정부와 대통합신당의 패배라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의 당선이 지닌 이런 제한적 의미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승자의 어법으로 말해도 한나라당을 통한 ‘정권 심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코 이명박의 승리가 아니다. 승자나 패자, 투표를 했든 안 했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일치해서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정권 심판이라는 이 한 가지 뿐이다. 이 지점을 넘어 한나라당이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 후보를 중심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한나라당은 금방 삐거덕거리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은 정권을 잡은 정당일 뿐 안팎으로 튼실한 정당이 결코 아니며 이 후보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이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고 심한 굴욕감을 안게 된 기막힌 선거라는 의미 지점이 있다. 이는 선거 이상의 중대 지점으로 정권교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공동체의 기초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여지없이 흔들어댄 최악의 후보가 당선된 탓이다. 이 후보가 불러일으킨 이 문제는 국민에 대한 모독을 넘어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탓이다.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은 이미 선거 전에 영국의 로이터 통신을 통해 “한나라당은 개(犬)를 후보로 내보내도 당선될 것”이라는 기사로도 반영된 바 있다. 이런 기막힌 보도가 이유 없는 것이라면 당장 국가적 항의를 해도 시원찮을 모욕이겠지만, 이런 외신 보도 앞에 유권자의 상당수는 절망감에 휩싸인 채 침묵한다. 이유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당선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근거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고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는 아니다. 제대로 부리지 못하면 오히려 진짜민주주의의 적이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더구나 그가 과연 대통령감으로서, 우리의 공동체가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있는 인격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 아닌가. 이 의문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의 약속을 실천할 국정 수행으로 보상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전혀 다른 문제일 뿐 아니라 문제의 깊이가 너무 깊다. 또 그를 찍지 않은 유권자들은 물론 그를 찍은 30% 남짓한 유권자들 중에서도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그에게 등을 돌릴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그 폭 또한 아주 넓다. 그에게 그 사람을 묻게 되는 이 의문은 여전히 언제 어떤 계기로든 활활 타오를 수 있는 불씨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공동체에 여전히 불안한 당선자일 뿐이다. 이 당선자는 이회창 후보를 찍고 정동영 후보를 찍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정치의 실종, 의미와 가치의 실종을 한탄하며 그의 거짓과 위선을 심판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로선 그의 불안이 우리 공동체의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남는다. 이는 그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의 불안이 이른바 일정 기간의 허니문이나 무원칙한 권력적 타협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불안을 고의로 덮기 위해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정치적 시도도, 이에 관계된 그 어떤 정치세력도 공동체의 이름으로 심판과 저항을 불러일으킴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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