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도시여. 호남의 광주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나요?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요?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져서 어디에 가 파묻혀 있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들은 또 어디에 눈을 뜬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어디에서 찢어져서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산산이 흩어졌나? ...(중략)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 죽고도 몇 백 번을 부활한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부분>
○…80년 5월 광주하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면서 세 점의 그림이 떠오른다. 중국 현대화가 웨민쥔(岳敏君)의「처형」(1995년 작)과 피카소의「게르니카」(1937년 작), 고야의「5월 3일의 처형」(1814년 작). 웨민쥔(岳敏君)의「처형」은 폭력을 고발한 그림치고는 아주 해학적이다. 처형을 당하는 사람이나 총을 겨누는 사람이나 모두 웃는다. 그러나 이 그림은 묘한 것 같다. 처음 대할 때는 웃음이 나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매우 슬퍼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폭력에 희생당하는 사람이나 희생을 가하는 사람이나 모두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구조적 모순에 의해 폭력이 이루어진다는 암시가 있는 듯하다. ○…피카소의「게르니카」는 직접적이기 보다 간접적 화풍으로 학살을 고발한다. 그러나 야만적 상황을 들여다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웨민쥔의 그림이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면 이 그림은 1937년 내전 중이었던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에서 자행된 독일군의 무차별적 폭격을 담아냈다. ○…고야의「5월 3일의 처형」은 보다 직접적이다. 180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해서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학살당하는 양민들의 얼굴은 나오나 총을 쏘는 프랑스 군인들의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폭력은 비인간적 그 자체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나는 아들에게 자주 못난 새끼라고 욕을 한다. 심부름을 엉뚱하게 했을 때나, 그토록 학원을 열심히 다녔으면서도 수학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을 때나, 비오는 날 우산을 들지 않고 등교했을 때나, 요란스럽게 치장 했을 때나… 폭력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비폭력? 대화? 공감? 합의? 조정?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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