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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는 것, ‘섹스’

〔문화/하다말다〕섹스 그리고 자귀나무

벼리 | 기사입력 2006/07/13 [09:33]

말할 수 있는 것, ‘섹스’

〔문화/하다말다〕섹스 그리고 자귀나무

벼리 | 입력 : 2006/07/13 [09:33]

얼마나 더 살지,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른다. 언젠가는 섹스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때가 오리라. 어쩌면 그보다 먼저 성욕부터 사라지지 않을까. 들은 얘기다. 섹스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때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섹스가 가능하다는 얘기일까. 늙은이가 되어서도?

돌이켜보면 섹스에 대한 관심, 심지어 부지불식간 몸으로 오는 그 느낌은 요 몇 해 사이 가물에 콩 나듯 한다. 혹자는 다 살았다, 뭔 재미로 사냐고 빈정거릴지 모르지만 그저 자연스럽다. 다행이 섹스문제로 갈등을 겪는 경우는 없으니 천만다행이다. 방식, 주기 등 섹스 코드가 맞지 않아 이혼하는 부부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하는 소리다.

▲ 연분홍 꽃송이들, 만발한 자귀나무를 만나다. 양평 갔다가 오는 길에서.     © 2006 벼리

섹스에 대한 관심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성욕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하는 것은 몸. 그 몸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자주 해야 할 사람은 자주 하는 것이 맞다. 고것밖에 모르는 색한, 색녀라는 비난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몸의 생명현상인 섹스를 도덕적인 차원에서 잘못 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단어 풀이를 근거로 한 색안경 쓰기가 아니라면 섹스는 음란, 외설, 포르노와 다르지 않다. 아니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섹스는 음란이나 외설, 포르노와 같다. 점잖은 사람, 설령 성자 같은 사람이라고 섹스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성자 같은 사람도 성욕이 있고 그 성욕은 상대가 있으면 섹스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느낌상 아닌 것 같아도 실은 기다. 보통사람임에랴! 이것이 음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섹스는 음란이요 외설, 포르노다. 외설적인 섹스, 생각한 해도 얼마나 짜릿한가!

이 정도 사고할 수 있다면 섹스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음란이라고 은폐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음란이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우. 하나는 허구적 표현물과 음란의 관계, 다른 하나는 음란과 청소년의 관계다.

허구적 표현물과 음란의 관계는 예술이든 하드코어, 소프트 코어, 로만 포르노 등과 같은 음란물이든 허구적 표현물에 나타난 음란을 도덕적으로 사법적으로 문제 삼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한 때 세인의 이목을 집중케 한 O양 비디오 사건처럼 다중에게 드러난 실제 음란이 아닌 허구 음란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설정방식 자체가 글러먹은 것이다.

다만, 허구적 표현물에 나타난 음란의 정도와 그 허구적 음란을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지가 사회가 도달한 도덕적 유연성, 음란물의 유통·소비과정에 대한 사회적 관리 능력에 따라 다를 뿐이다.

허구적 음란의 허용문제에 관한 한 한국사회의 의식, 제도의 수준은 치기(稚氣) 그 자체다. 시민단체라고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단체들이 더 설쳐대곤 한다. 만약 ‘하드코아 전용관’ 설치를 정부가 허용하면 보통성인들은 아마 1년에 서너 편 정도는 파트너 손을 잡고 보지 않을까 싶다. 섹스 갈등에서 비롯된 이혼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음란과 청소년의 관계는 잘 알려진 대로 청소년 ‘보호’가 명분이다. 말이 보호지 실은 ‘격리’다. 격리의 함축적인 의미, 그 메시지는 욕망하는 청소년의 감성과 인식의 억압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는 청소년이 안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의 은폐다. 음란과 청소년의 관계는 핵심이 격리의 문제라는 것. 청소년보호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과 갈등의 테마가 바로 이것이었다.

청소년의 감성과 인식에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접근이 보장되어야 한다. 음란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들도 누리고 싶은 만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야 한다는 이유에서는 음란, 음란한 섹스에 대한 교육이 병행되면 된다. 청소년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뒷받침된다면 그들은 음성적으로 음란을 배우고 자란 지금의 성인과는 사뭇 다른 ‘신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이 2차 성징이 한창 진행 중이다. 몸에 나타나는 변화를 주시하라고 몇 번을 말해주었다. 일상생활에서 이성에 대한 생각과 느낌도 일어날 경우에 대해서도 잘 관찰해보라고 몇 번 말해주었다. 뭔가 풀리지 않는 데가 있을 때, 그 때 대화를 나눠보자는 얘기도 해주었다. 이럴 수 있는 것은 아들과 같은 중학교 2학년 때 어떤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체험한 바 있기 때문. 물론 아들과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요즘은 섹스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관심 역시 현저하게 줄었다. 무엇보다도 성욕이 그렇다. 몸의 세월은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대신 몸의 다른 능력이 강화되었으며, 다른 관심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내 식대로 살겠다는 욕망이 꺼질 줄 모른다. 그렇다고 드물긴 하지만 불끈 치솟는 성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살아 있다는 느낌. 섹스는 생명현상, 몸, 내 몸의 그것이기에(섹스는 인간 자체의 생산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생명현상이다).

오늘 강과 산간수가 만나는 곳에 가서 홀딱 벗고 몸을 씻었다. 몸을 만지며 느낀다. 다소 여의었다. 한편으론 그런 몸이 애착도 가고 다른 한편으로 흩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짙다. 그런 몸이기에 한 동안 잊었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하얀 털들. 옷이라는 껍데기(?)로 또는 몸의 무관심으로 가려졌던 그것. 느낌이 묘하다. 단순히 몸이 늙는다는 느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런 것.

돌아오는 길에 자귀나무를 만났다. 찻길 근처 비탈에 서서 연분홍 꽃이 만발했다. 좋아하는 나무라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다. 한가롭게 자리한 집 뜨락에 자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자귀나무는 그래야 제 격. 두 가지 이유를 알고 있다.

우선, 자귀나무는 섹스 코드가 맞는 부부를 상징한다. 부부의 일상사에서 다른 문제가 별로 없고 섹스 코드가 맞는다면 말마따나 천생연분 금슬 좋은 부부다. 자귀나무가 이런 상징성을 얻게 된 것은 밤에 마주보는 잎사귀가 서로 합쳐지는 수면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금슬 좋은 부부가 밤에 포개지는 것처럼.

사실 자귀나무라는 말도 잠자는 데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잠잔다? 섹스의 은유가 아닌가. 자귀나무를 한자로 夜合樹(야합수), 合歡樹(합환수)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금슬 좋은 부부가 사는 집 뜨락에 한 그루 정도 있어야 제 맛이 나는 나무가 아니겠는가.

둘째, 자귀나무는 정원수로서 가치가 높다. 장마철을 전후한 시기에 자귀나무는 꽃이 만발한다. 하나의 꽃송이는 마치 수백 개의 연분홍 명주실이 작은 공 모양을 이룬 듯한데 나무에 만발하면 그 색감이며 운치가 가히 환상적이다. 이런 탓인지 자귀나무는 온갖 나비들이 몰려드는 나무. 중학교 시절 나비가 좋아선지 장자를 읽었던 탓인지 나비에 미쳤던 때가 있었다. 장마철 잠깐 반짝이는 햇살 아래 자귀나무를 찾아 몇 시간이고 나비 구경을 하곤 했다. 환상, 환각, 환장!

자귀나무는 양지에 사는 나무라 집 뜨락이 맞고 겨울 같으면 추운 곳을 피해 날아든 새들이 잘 쉬어간다. 가지가 성글어 겨울에는 콩깍지 같은 긴 열매가 바람에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낸다. 들어라. 새들을 불러들이는 뜻이 우선일 터이지만 귀를 기울이는 이에게는 망아(忘我)의 힘이 있다.

처가에는 일찍부터 권해서 여러 해 전 옛집을 헐고 새집 지을 때 큰 처남이 자귀나무를 심었다. 언젠가 살 만한 터를 잡는 일이 생기면(그녀의 소망대로라면 얼추 아이들이 자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심고 싶은 나무다. 나비에 미쳐 자귀나무를 찾던 아름다운 옛 추억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자귀나무의 합환을 즐기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 자귀나무를 바라보며 성욕이 왕성했던 젊은 한 때를 아쉬워하리라. 가난한 젊은 날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새끼 둘 낳고 함께 살아온 그녀, 조화로운 삶의 현실을 가르쳐준 벗이자 교사인 그녀를 잊지 않고자 함이다. 어쩌면 그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한 잠자리도 떠올리다가 겸연쩍게 웃는 때도 없지 않으리.

얼마나 더 살지,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른다. 그런 평화의 긴장 속에서 행복은 비로소 찾아든다. 행복하다. 이 순간-이 영원. 게다가 눈 앞에는 ‘늙은 자귀나무가 있는 집’이 있고 거기에 내가 한가롭게 서 있고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로 어린 그녀가 어른거린다. 인생, 미래이자 동시에 현실인 인생이리라.

아직은 성욕이 남아 있다. 섹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정말 맘에 와 닿는 여자가 눈에 띄면 (저기요-) 말도 걸고 싶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생물학적 나이는? 마흔 여섯. 정신 못 차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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