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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 수 있을까? ‘바르게 살자’

〔문화/하다말다〕‘바르게 살자’는 구호

벼리 | 기사입력 2006/08/06 [23:00]

성공할 수 있을까? ‘바르게 살자’

〔문화/하다말다〕‘바르게 살자’는 구호

벼리 | 입력 : 2006/08/06 [23:00]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터리 언저리에는 큰 비석이 하나 폼 나게 서 있다. “바르게 살자.” 사단법인 바르게살기중앙운동협의회가 전국 곳곳에 세운 것 중 하나다. 처음 이 비석을 봤을 때 키득키득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얼굴에 뭔가를 바를 수 있게 살자”는 건 아닐 테고…. 이런저런 잡념 끝에 딱 떨어지는 인물 하나가 떠올랐으니……고건 총리! 실제 삶도 대한민국 대표 모범생이라고 한다. 거기에 비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왠지 이런 비석이 어울릴 것 같다. “개기며 살자.” (참고로 우리 집 가훈은 “개며 살자”다. 이불…) /‘한겨레21’ 2004년 5월25일 제511호, ‘시사넌센스’에 실린 고경태 기자의 글

▲ 전국 곳곳에 세워진 ‘바르게 살자’ 푯돌 가운데 하나. 이 푯돌에 새겨진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구호는 과연 구호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 성남투데이


굳이 이 글을 찾아 인용하는 것은 글의 실마리를 삼기 위함이다. 이번 여름 짧은 가족여행 중에 지방의 한 작은 소공원에서 마주친 ‘바르게 살자’라는 푯돌을 보고 그녀가  “짜증나, 아름다운 말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한 마디 했기 때문에 이 글은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공감의 뜻을 선물하는 글이다.

인용한 짧은 글에선 ‘바르게 살자’는 사회계몽의 구호를 키득키득거리며 ‘얼굴에 뭔가를 바를 수 있게 살자?’로 역전시키는 조롱의 미학이 있다. ‘개기며 살자’나 이를 말놀이 삼은 ‘이불 개며 살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같은 조롱의 전제는 물론 바르게 살자는 푯돌을 보는 이가 바르게 살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누가 그 구호를 귀담아 듣기나 하겠니?”라는 반문 비슷한 것이다.

고 기자의 조롱은 고건총리를 대한민국 대표 모범생이라며 ‘범생이’로 인식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특정한 정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즉 특정한 형태의 사회나 정치체제에 고분고분한 순종형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구호로서 제시되고 주입되는 이데올로기 말이다.

바르게 살자는 구호는 더도 덜도 아닌 ‘대한민국 대표 관변조직’ 바르게살기협의회의 구성원들을 묶는 구호다. 물론 구호가 없는 시대, 사회는 없다. 하지만 요즘 관변단체의 실제 사회적 위상이 이들 단체들이 한창 잘 나가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바르게살기협의회의 구호는 그 단체 안에서나 제대로 공유하면 ‘성공할 수 있는’(?) 구호-구호 아래 뭉쳐라!‘(?)-인 셈이다.

문제는 이 구호가 조직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데 있다. 고 기자가 쓴 것처럼 거리로 뛰쳐나와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터리 언저리를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는 게 문제다(대개 ‘바르게 살자’는 공공공간 곧 공적 공간에 세워지곤 하는데 성남의 중앙공원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 구호가 조직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뜻?

그 의미는 이 구호가 바르게살기협의회의 구성원들을 묶는 구호에 멈추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들을 묶는 구호이길 바란다는 것이다. 꿈도 크다. 이 점에서 이 구호는 권력적이며, 현실을 구호처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곧 ‘정치이데올로기’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설득당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따라서 어떤 의미있는 기호작용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당하기 일쑤다. 특히 이데올로기가 거리로 뛰쳐나온 구호로서 제시되는 경우, 그 구호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에선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바르게 살자’의 경우 다중의 공유공간인 공공공간에 마구잡이로 세워지곤 한다는 점에서 그 폭력성은 가시적이다.

거부당한다는 것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갈등은 다방면에서 발생할 우려가 높다. 나처럼 모든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알레르기 체질인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요즘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권이나 사회운동에서 통용되는 보수와 진보의 계선이 아닌 균형, 열림, 조화, 네트워킹과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계선(?)이 등장하고 장르적 의미에선 여성, 생태환경, 문화, 소수자운동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등장이 이미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이북의 빨갱이를 때려잡자는 반공의식으로 똘똘 무장된 세대는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임을 교육받으며 성장한 세대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적 계선이나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를 신념화한 사람들과 다양한 차원,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혹자는 냉소주의-냉소주의도 하나의 비판이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똥폼 나게 살자!” 90년대 후반 펑크록그룹 삐삐롱스타킹의 노래 ‘바보버스’에는 이런 신나는 구절도 나온다. “잘난 척 하지 마, ‘똑바로’ 살아봐!”(작은 따옴표는 내가 쳤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련다. “시끄럽네!”

바르게 살자는 구호는 윤리 측면에서 볼 때도 요즘 애들 말마따나 ‘후졌다’. 그것은 개인에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인 ‘의무’과 ‘당위’를 애써 강조하는 ‘거대윤리’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개인의 차이 곧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욕구와 취향을 윤리의 문제로 끌어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의 추세와 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져 있는 셈이다.

윤리가 발생하는 지점은 개인성과 사회성이 만나는 곳이다. 개인성이 개인간의 차이에 관한 문제라면, 사회성은 개인들이 맺는 관계에 관한 문제다. 전자가 (가능한 한) 허용하자는 것을 이슈 삼는다면, 후자는 어울려 살기 위해 어떤 방식의 관계를 맺느냐를 이슈 삼는다. 전자가 최대한 개인의 욕구와 취향을 존중해주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면, 후자는 어울려 살기 위해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가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개인성과 사회적 환경이라는 두 측면을 동시적으로 고려할 때 사회 속에서 개인이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윤리가 성립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르게 살자는 것은 결코 개인이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옥죄는 사회적 명령으로서의 율법일 뿐이다. 게다가 이 사회적 명령은 개인들이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고정되고 정체된 낡은 윤리 따라서 요즘 시대에 맞는 윤리가 결코 아니다. 후졌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 점에서 과연 바르게 살자는 낡은 윤리가 그 구성원들에게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고 시대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윤리로서 작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앞에서 과연 이 구호가 정치구호로서 구성원들을 묶는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를 던진 것도 이 같은 윤리적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구호의 특성상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겠다. 법으로 보호받고 지원받는 관변단체이니까 이 구호가 단체의 구성원들을 정치적으로 묶는 구호가 될 수 있을지는.

이 낡은 윤리구호는 그 윤리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어야지 바깥으로 뛰쳐나와서는 곤란하다. 그 윤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와 그녀, 혹은 차이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나 깨인 여성들, 특히 도처에서 어울려 사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깨인 개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윤리이기 때문이다.

바르게 살자고? 혹자는 이렇게 유쾌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빔밥처럼 썩썩 비벼가며 살자!” 나는 다음과 같이 좀 점잖게 말하련다. “네 이웃의 차이를 네 몸의 차이와 같이 소중히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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