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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은행나무 화분이 아니다

〔문화/하다말다〕이색적인 주차방해물

벼리 | 기사입력 2006/10/10 [02:33]

이것은 은행나무 화분이 아니다

〔문화/하다말다〕이색적인 주차방해물

벼리 | 입력 : 2006/10/10 [02:33]
약수라도 뜨기 위해 남한산에 가기 위해서는 지나치지 않으면 안 되는 동네 길이 있다. 이 길은 자동차 바퀴와 똑같은 빛깔의 아스팔트가 깔리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하얀 주차구획선이 그어져 있다. 구청에서 친절하게도 그어놓은 듯하다. 이 길은 주차구획선 사이로 충분히 자동차 한 대는 지나다닐 수 있어 어느 정도 폭을 유지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도 같다.

그러나 요즘 세태로는 주차구획선을 그어놓지 않았다고 자동차를 내 집 앞에 세워두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해 놓은 게 아닌가 싶다. 내 집 앞에만 자동차를 세워두려는 얄팍한 심사들에 편승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니 영 개운치 않다. 게다가 주차구획선은 한 대 자동차 간격으로 일렬로 길 가장자리에 구획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식할 정도로 집단적 질서를 강요하고 있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주차구획선은 달갑지 않은 풍경이다. 
▲ 은행나무 화분일까, 주차방해물일까? 양지동에서.     © 성남투데이


주차구획선이 그어진 길은 동네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차도가 아니다. 엄연히 인도다. 자동차가 지나가더라도 거북이보다 더 느려야 마땅한 길이다. 12살 막내아들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 동네 길에서 아직도 다리에 흉터가 남은 교통사교를 당한 것은 지금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길에서 보행은 필수다. 어떤 유명한 정치인은 동네에서는 절대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도시생활에서 차도와 인도가 엄격히 구분되어 보행이 보호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심보다도 동네에선 보행이 더 보호를 받아야 한다. 동네에서 자동차로 인해 보행에 지장을 받는 것은 물론 생명의 안전까지도 염려해야 한다면 이는 참으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면 주차구획선이 그어진 이 동네 길은 실은 어린것들이 뛰어놀고 주민들이 길가에 돗자리를 깔고서는 오순도순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더 나아가 이 동네는 재개발구역에 포함되지 않을 만큼 그래도 이 도시에선 보기 드문 아늑함도 배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동네 길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화단이나 집 밖에 내놓은 화분들은 한결같이 풍요롭고 정감이 넘친다.

주차난이 얼마나 심각한 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다고 누가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반문에 깔린 문제의식이란 좋게 말해도 임기웅변이요 나쁘게 말해서 큰 책임에 대한 교묘한 회피일 뿐이다. 동네를 포함해 도시를 계획하고 만들 때 도시의 과거, 현재는 물론 다가올 미래가 포함되어야 함은 상식이다. 이 점에서 도시의 전사(全史)를 고려하지 못하는 이들이 큰 책임이 있다는 문제의식은 정당한 것이다.

이 동네의 주차문제만 하더라도 내 집 앞에 자동차를 세워둬야 직성이 풀리는 주민들보다 집주인에게 주차장을 만들게 하거나 또는 동네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주차장을 만들어 놓지 않은 이들이 큰 책임이 있다. 대개 이들은 도시계획학, 건축학, 법학, 수학 등 공간 관련 담론체계에 관계하는 전문가들이나 관료들이다. 앙리 르페브르가 ‘공간의 재현’이라 부른 공식적인 공간제도에 관여하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재현방식에 따라 사회적 관계가 재생산된다며 이를 ‘공간적 실천’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만들어낸 공간제도에 따라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일정한 공간 안에서의 사회적 관계란 한계지워진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특정공간을 계획하고 만들어낸 이들의 정책적인 오류를 책임지우는 일이 중요해진다. 그래야 이들이 함부로 도시를 계획하거나 만들지는 않을 것이므로. 하긴 이 도시는 나이 서른이 갓 넘어서자마자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도시 재생을 내건 도시재개발에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부실도시의 전범이 아니던가.

이 동네 길을 지나칠 때마다 이색적인 주차방해물을 마주치게 된다. 바로 은행나무 화분이다. 어떻게 주차방해물인지 알 수 있을까. 자동차가 없을 때는 늘 주차구획선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남이 주차를 위해 치우기 위해서는 어른이 들기에도 힘겨울 만큼 무게가 있어 보이는 제법 큰 화분이기 때문이다. 일단 흉물스럽지 않아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주차방해물은 들기가 버거워 어찌나 끌어당기기를 반복했는지 화분 밑바닥이 비스듬하게 닳아버렸다. 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화분을 바라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이 주차방해물은 나뭇가지에 반짝거리는 테이프들이 매달려 있어 눈에 확 뜨이는데 아마도 다른 사람은 주차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인 듯하다.

이 은행나무 화분은 흉물스럽지 않고 개성있는 주차방해물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시각적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곧 이 도시가 얼마나 흉물스러운 주차방해물로 가득한지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은행나무 화분은 이 도시의 위기를 읽어내는 역설적인 지표일 뿐이다. 그 자체로는 가시성으로 충만한 은행나무 화분은 결국 남에게 주차금지라는 비가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에 충실한 데 그치고 만다.

들 수 없는 그 무거운 화분을 매일매일 끌어당기기를 반복하면서 엉덩이를 추켜세운 광경을 상상하면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 광경이란 결국 내 집 앞에 내 자동차를 세워둬야 한다는 의식 바로 그것이며 그럼으로써 동네의 이웃과 동네를 찾은 손님을 배제하는 기호일 뿐이다. 저 생긴 대로 완상케 하면 좋았을 은행나무 화분이 한낱 주차방해물에 불과하다는 점은 어떤 의미를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표와 기의의 분리이자 이 동네를 떠도는 덧없는 기호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동네가 처한 위태로움을 드러내는 이정표이자 뚜렷한 초점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위태로움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진술은 거짓인 셈이다.

참은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 그리고 이 진리에는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인간-우리를 보는 나의 서글픈 사랑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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