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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과 된장, 그리고 수호천사

〔문화/하다말다〕나는 매저키스트 같아…

벼리 | 기사입력 2006/08/17 [23:34]

똥과 된장, 그리고 수호천사

〔문화/하다말다〕나는 매저키스트 같아…

벼리 | 입력 : 2006/08/17 [23:34]
어떤 맥락에서 나는 매저키즘(masochism, 피학증)적이다. 비난 받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내 심사가 정상인들과 달리 도착(倒錯)적이어서? 과연 그럴까? 20여년 전, 내가 읽었던 책의 제목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외세, 독재와 투쟁한 혁명가들의 의미는? 불꽃처럼 타오른 그들의 저항정신은 과연 매저키즘과 얼마나 다를까?

상대로부터 총 소리가 나야 나도 총을 쏘든 삽십육계 줄행랑을 치든 할 게 아닌가. 빵!-빵빵! 빵!-아이고, 무서워라, 튀어! 비난을 통해 나는 그 실재, 현실을 ‘확인한다’. 비난이 실제로 있다는 것, 그 현실을 우선 확인한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나 주장과는 다른 그 비난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는지, 불화이부동(不和而不同)하는지 ‘따져본다’. 여기에 그치나?

아니다. 그 비난이 접속할 수 있는 많은-모든 통로들, 심지어 그 비난이 교묘히 감추고 있을지 모를 ‘지하 뻥커’(?)에 대해서도 에로틱하게 ‘상상한다’. 물론 이 확인, 논증, 상상은 비난이 놓여져 있는 ‘맥락’을 고려한다. 이 같은 태도는? 한 마디로  ‘냉혹함’ 그 자체다. 그렇다. 나는 아주 냉혹하다.

남이 나를 추켜준다고 덮어놓고 좋아라 실실거릴 까닭도 없고, 남이 나를 깎아내린다고 화들짝 놀라 달려들지 않는다. 이 두 경우는 ‘조로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냉혹함을 통해 나는 다시 한번 현실을 생생하게 이해한다.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그렇구나, 불화이부동이 실재하는구나!-(적지만 또는) 화이부동이 실재하는구나!

비난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대개 비난들은 불화이부동이다. 부인할 수밖에! 그러나 구분하자. 부인과 부정은 다르다. 부정이 상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부인은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부정은 단절적이다. 그러나 부인은 관계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야말로 바로 ‘인간의 조건’ 아닌가.

따라서 부정은 그 무기를 무반응(무시) 또는 파괴로 삼는다. 부인은 그 무기가 ‘대화’, ‘설득’이다. 대화, 설득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관계의 내용, 으뜸가는 내용이 아닌가. 내가 비난을 즐긴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대화와 설득을 관계의 속살로 채워놓고 싶어서다. 이런 삶을 살고자 함이다.

그러나 열에 아홉, 비난하는 자들은 달려들었다간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핀(투명인간)도 아닌 자들이 익명성을 미끼로 그리핀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안다. 상대에 대해서 ‘차이’를 ‘우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잘 들어두시라,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상대에 대해 ‘다르다’는 것을 ‘더 낫다’, ‘더 못하다’로 쉽게 바꾸는 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보인다. 그들은 가치판단에서 도덕판단으로 쉽게 태도를 옮겨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도덕판단이란 매우 정체된 것이다. “나보다 못하다! 고로 너는 악이다!” 돌아버린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내가 낫다! 고로 나는 선이다!”라는 뜻을 심리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쌍방향’, ‘의사소통’을 특성으로 한다는 인터넷이 시작되면서 ‘익명’을 악용한 ‘폭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새로운 공동체로 기대되었던 ‘사이버공동체’는 오히려 위기로 치닫는다. 가시적으로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현실세계도 이를 닮아간다는 강한 느낌도 있다. 종종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럼 “전라도 놈들은 이래서 욕 먹어”(?!)라는 내 칼럼에 17일에 단 댓글을 통해 내게 맹렬한 비난을 퍼부은 자에게 말을 걸어보자(아래에 그의 비난을 그대로 소개한다). 그의 아이디는 ‘얼큰이’. 그를 주목하는 계기가 있다면, 최근 내가 시청사에 설치된 CCTV문제를 여러 차례 다루면서 그의 댓글을 인용, 반박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나를 향해 “성남시 행정의 모든 부분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의 대표적 주구 역할을 하는 소인배 사이비 기자”, “성남시 발전을 해치려고 하는 협잡꾼”이라고 단정투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내가 저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동시에 ‘주구’·‘소인배’·‘협잡꾼’으로 도덕적 재단을 가한 것이다.

▲ 선암사 뒤깐, 가보셨나요? 똥을 똥이라고 즉물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이란….     © 성남투데이

아무튼 즐겁다. 비난 받으니! 그렇다고 새디스트들이 즐겨하듯이 쫀쫀하게 그가 말한 것들에 대해 구구절절 가릴 이유는 없다고 느낀다. 그가 댓글에서 말한 것처럼 나 역시 그의 높은(?) ‘지적 수준’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서 그가 말한 것 가운데 딱 한 가지만 거론하련다. 그는 광명시장의 호남비하 발언에 대한 나의 “똥인지 된장인지 가리지 못한다”는 표현을 문제 삼았다.

왜일까? 그는 이 표현이 점잖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그의 지적 수준에 걸맞게 ‘똥’이라는 표현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점잖은 사람인지, 그 흔한 똥이라는 말을 ○로 처리했다. 된장과 비슷하다고 어떻게 똥이라는 표현을 (언론에서) 감히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기막혀! 지극히 상식적인 말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딴나라’에서 왔나?

“똥인지 된장인지 가리지 못한다”는 말을 쓸 때 누구나 염두에 두는 것은 똥과 된장의 유사성이 아니다. 차이다. 냄새의 차이다. 구린내와 구수함의 차이, 아무리 닮은꼴로 보여도 그 냄새의 차이는 ‘엄청나게’ 다르다. 외관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낼 때 쓰는 말인 셈이다. 게다가 민초들의 삶의 지혜를 담은 속담이다. 언론 아니라 언론 할아비 같은 곳에서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광명시장의 호남비하 발언은 호남사람들, 호남출신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포착되었기 때문에 언론과 시민들의 뭇매를 맞았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본질적인 차이가 포착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나라당이 그의 정치생명을 빼앗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는 속담을 인용했다고 해서 표현을 문제 삼고 내게 주구, 소인배, 협잡꾼 운운하는 비난을 보면서 나는 언뜻 서구예술사에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며 이른바 ‘예술모방론’을 제창한 플라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발상과 얼큰이씨의 발상이 사실상 같고, 이 같은 발상이 우리 사회에 끈질기게 돌아다니며 사상적 폭력을 자행하고 물리적인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깊은 우려에서다.

플라톤의 모방론은 두 개의 모방론으로 구성된다. 우선 ‘단순모방론’. 그저 회화,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은 ‘생각 없이’ 자연을 베끼고 흉내 낸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에 대해 요즘의 미술가들은 배꼽을 잡고 뒤로 자빠진다! 플라톤의 모방론은 이미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과 같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에 의해 틀려먹었다고 판정받은 바 있다.

예술이 생각이 개입된 모방임을 이해하지 못한 플라톤에게 어디 한번 들려주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 그의 반응은? 단순모방론자인 그는 결코 보이지 않는 냄새를 이해할 수 없다! 얼큰이씨에게 다시 한번 들려주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 그의 반응은? 코가 없나? 그럼 잡숴봐야 아나?

두 번째는 표현모방론. 시, 춤, 연극과 같은 표현예술은 영감이라는 주술력에 의해 정상인의 넋을 빼앗아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요즘의 시인이나 춤꾼이 들으면 역시 포복절도할 주장이다. 영감의 다른 말은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표현모방론에 따라 플라톤은 당시 조형예술이 예술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과는 달리 예술로 인정받은 표현예술에 대해 관료들에 의한 ‘시인추방론’과 ‘예술검열제도’를 주창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만약 플라톤이 큰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그는 진시황제처럼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자행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상상력을 부정한 플라톤에게 어디 한번 들려주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 그의 반응은? 감히 된장에다 똥을 갖다 붙이다니! 혹세무민하다니! 추방해버려! 얼큰이씨에게 다시 한번 들려주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 그의 반응은?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나? 그럼 진짜 잡숴봐야 아나? 그가 만약 통제받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왜 나를 주구, 소인배, 협잡꾼 운운하며 맹렬하게 비난했을까? 심심한데 어디 법에 한번 기대볼까? 과연 내게 어울릴까? 법에 우선하는 가치 있는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라야지. 비난의 이유, 근거랄까 그의 댓글에 충분히 드러난다. “성남시 발전”을 위해서! 나로 하여금 “제대로 된 표현력과 양식과 인격을 갖춘 기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와, 멋져! 그대 이름은 ‘수호천사’여! 그러나, 어쪄?

‘암만해도 나는 냉혹한 매저키스트 같아…’

*. 덧붙임 : 다음은 얼큰이씨가 쓴 댓글.

 벼리라는 기자는 언어순화 좀 해야겠다
얼큰이
06/08/17 [14:09]

뜬금없이 광명을 왜 이 지면에 끌어 들였을까?
벼리라는 기자(기자인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혹시 호남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본인도 그러신건가?
전국 매스컴을 장식한 광명건에 대해 지방언론의 이름없는 무명기자가
왜 새삼 이 얘기를 끄집어내는지, 울화통이 터진다.
무엇보다도 벼리라는 기자의 인간성, 아니 지적수준을 묻고 싶다.
차마 언론인이라 하면 경계해야 하는 "○인지 된장인지...."라는 표현에서 이 지방지의 수준을 알 것 같다.
결론적으로 성남시 행정의 모든 부분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의 대표적 주구역할을 하는 소인배 사이비 기자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온갖 미사여구 늘어놓지 않고 간단하면서도 함축적인 언어표현으로 쉽게 전달하여야 함이 언어의 본 역할 아닌가?
가끔가다 들어와 보면 너무 장황하고 엉뚱한 논리전개와 이기적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면을 보게 되는데, 성남시 발전을 해치려고 하는 협잡꾼의 냄새를 풍겨대고 있다.
성남투데이가 발전하고 시민의 사랑을 받으려면 제대로 된 표현력과 양식과 인격을 갖춘 기자를 뽑기를 바란다.
더 이상 이런 막 되먹은 표현을 해대는 기자나부랭이의 글을 보자니 역겹고 불편하다...
중앙언론매체의 사안을 성남시로 끌어대어 이슈화하는 모습도 보기 싫다...
자식들이 읽어 본다고 생각하며 글을 쓸 수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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