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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문화/하다말다〕다수사회, 소수화하는 소수

벼리 | 기사입력 2006/07/17 [00:35]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문화/하다말다〕다수사회, 소수화하는 소수

벼리 | 입력 : 2006/07/17 [00:35]
아주 오래 동안 잔뜩 어깨에 힘을 주던 정치가 기가 죽었다. 힘이 소진된 탓이다. 호흡을 가다듬는 참을성을 익히지 못했으며 힘써야 할 데를 골라 쓰지 않고 아무데나 마구 힘쓴 탓이다. 대신 경제와 문화 등 다른 사회영역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치권력 대신 경제권력, 문화권력이란 말도 자주 듣고 있는 중이다. 권력의 의미도 변화하고 있다고 듣는 중이다. 다양한 사회영역들에서 다양한 개인, 집단들이 ‘스스로의 힘’을 느끼고 있다고 듣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삶에서 직·간접적으로 마주친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낙후된 자들이 정치가들이었다는 점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그들의 무식함(생각없음), 무원칙함, 이중성, 비경제성, 비문화성, 비윤리성, 패거리근성, 노예근성이야말로 그들의 낙후함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이런 표상들이 동시에 그들을 측정하는 좌표가 되어 버렸다는 현실이야말로 정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유력한 입증이다. 삶의 지속성이란 관점에선 그들은 ‘운명적인 추풍낙엽’이다.
 
▲ 다윗과 골리앗(David and Goliath). 다윗이 골리앗을 쳐죽인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구에르치노(Guercino:1591∼1666)가 그린 그림으로 영국 런던 트라팔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약성서 《사무엘서》 상17장에는 “다윗은 칼도 없이 팔매돌 하나로 불레셋 장수를 누르고 쳐죽였다. 다윗은 달려 가서 그 불레셋 장수를 밟고 서서 그의 칼집에서 칼을 빼어 목을 잘랐다.”라고 적고 있다.     © 성남투데이

힘이 이동하고 있다. 시대가 크게 변했다. 정치의 시대는 가고 경제의 시대, 문화의 시대, 다양성의 시대가 왔다는 그 힘찬 행군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중이다. 이런 시대 변전의 이면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소수사회가 소수가 다수를 빨아들여 다수를 말아먹는 사회라면 다수사회는 다수를 구성하는 소수가 다수를 향해 재롱을 피우고 다수가 그 재롱의 내용과 수준을 봐서 끼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힘이 소수에서 다수로 분산되고 분산된만큼 다수가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수사회에서 다수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변화했을지 모른다.

다수사회에서는 헤게모니 곧 힘의 중심이 없다. 힘의 작용방식은 소수가 다수를 향해 발산하는 원심력이며, 힘의 존재방식은 서로 다른 소수의 힘들이 적극적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공존·병점의 방식이다. 따라서 지배가 아닌 지지가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소수사회에서 탄생한 영웅·신화와 오늘날 다수사회에서 탄생하는 영웅·신화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더 이상 정치에서 영웅·신화가 탄생하기 힘들다는 점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집중에서 분산으로, 수렴에서 확산으로, 부분에서 총체로. 통합에서 세분화(소수화)로, 지배와 독점에서 지지와 공존·병점으로. 다수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소수사회에서 소수가 다수의 지지를 받는 다수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이 점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구별짓기는 얼마나 무기력한가. 설령 그것이 구호의 수준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낡아버린 정치라는 척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마찬가지다.

진보를 속죄양 삼아 두들겨 패는 상투성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는 꼴사납다. 오로지 기득권 유지 목적으로 과거에 매몰되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며 미래를 밝히지 못하는 보수꼴통은 정말 가관이다. 그런데도 토한즉 의미를 상실하는 통합과 화합을 외치는 보수의 사기행각이란! 그들의 의식, 그들의 문화가 ‘복고풍’임을 직시하라. 이 점에서 키치적인 그들은 다수사회의 징후를,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하며 여전히 소수사회에 살고 있다는 착각-옛날이 오늘이소서!-에 빠져 있다.

구실인즉 이제 겨우 시작이란다. 좁은 제 울타리를 뛰쳐나가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로 쌩쇼 부리는 진보 역시 가관이다. 소수가 진보를 때리면 역시 똑같은 이유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당적 관계(?)를 지우고 보수에 힘을 실어주려는 음모라고 짖어댄다. 진보에도 보수 못지않은 진보꼴통들이 있다! 게다가 진보 안의 분파주의란! 차이를 적대로 해석하는 분파주의로 인해 진보는 흔히 적전(敵前) 분열한다.

힘의 이동, 시대의 변화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수사회에서 다수사회로의 변화의 핵심이 닫힌 소수에서 열린 소수로, 그 소수화에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른 실천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구멍난 곳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라. 구멍난 곳? 닫기만 하는 곳! 상대만? 자신도! 소통과 연대의 네트워킹을 실험하라. 할 수만 있다면 네트워크군대를 창설하라. 관계는 미덕이다. 독존은 악덕이다. 더 이상 똑같은 것은 지긋지긋하다. 역겹다. 다른 것들이 아름답다! 어울리는 다른 것들이 강하고 아름답다!

다윗과 골리앗이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쳤다. 결전의 찬스가 왔을 때 끝내기 수, 그 위대한 외통수는 아무나 쓸 수 없다. 그 수는 오로지 준비해온 자에 속한다. 더 이상 딱딱해진 대가리로 살지 말라. 더 이상 주워담지도 못하는 주둥이로 살지 말라.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자, 네트워킹을 실험하는 자만이 마침내 위대한 외통수를 날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는 비결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누구의 몫인가? 다수사회의 소수다.

소수란 무엇인가? 소수는 늘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늘 안이 아닌 밖을 염두에 둔다. 틀 안(사유방식, 場이라는 형식)에서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틀 자체에 대한 변화도 서슴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위대한 네트워킹의 필요조건이다. 이미 낡아버린 보수와 진보가 엽전의 시간을 ‘소비’한다면, 소수는 긴장의 시간을 ‘생산’하고 ‘유희’한다. 다시 소수란 무엇인가? 소수는 소수화하는 소수다. 영원한 소수, 영원한 다수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자, ‘기억’해두자, 구에르치노의 위대한 그림을. 이 기억을 영토삼아 ‘명령(강조한다는 취지에서, 실은 ‘제안’의 뜻이다)’한다, 이 기억을 영토삼는 모든 소수에게.

‘소수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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