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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이 소녀를 보라!

〔문화/하다말다〕이다의 허접질

벼리 | 기사입력 2006/08/28 [03:07]

늙지 않는 이 소녀를 보라!

〔문화/하다말다〕이다의 허접질

벼리 | 입력 : 2006/08/28 [03:07]
물론 여성에 대한 내 관점으로 <이다(2da)의 허접질>을 보면 그녀가 스스로 허접하다고 말하는 그 허접질은 결코 허접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데,

가장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유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어내고 싶을 정도다. 스테레오 타입의 구닥다리 삶을 사는 그런 인간유형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비교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공감이 가는 인간유형에 속한다. 여성 경계인이랄까, 여성 방외인이랄까.

이 경우 경계인-방외인이란 중심과 변방, 주류와 비주류, 남성과 여성, 지배와 피지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과 같은 힘의 우열을 드러내는 경계뿐만 아니라 모든 이분법적인 대립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다. 그렇다고 그녀의 허접질이 하는 족족 그 수준에 도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도 신이 아닌 인간인 한, 그런 영역에 도달한다는 거짓말이므로.

▲ 이다의 허접질 <널 미워해 그래서 널 사랑해>(2006년 7월 11일) 이미지 출처 : http://www.2daplay.net     © 성남투데이

수컷인 내가 여성을 운운한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 하지만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다는 그 원죄적인 신화를 깨부수는 일에서부터 여성의 삶의 모든 계기들에서 여성을 여성으로만 몰고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안티를 통해서 여성의 복권을 주창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도 그녀의 허접질은 이색적이다. 이런 시각에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녀의 허접질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한 말의 살아 있는 사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자신 외의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기 나름의 차이점과 맺는 힘겨운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다름 아닌 ‘여성성’(feminity)이라는 수수께끼와 만나게 된다. 존재하는 여성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여성성’들을 가진 그런 여성성 개념을 나는 좋아한다.”

크리스테바의 진술은 물론 생물학적인 성(sex)이나 문화적인 성(gender)이 아니라 총체적 의미의 성(sexuality)의 맥락에서 하는 말.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루소)나 ‘여성은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보부아르)가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지점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바로 이다의 허접질은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서로 다르고 달라야 하는 여성성의 생생한 사례가 된다.

물론 이다처럼 드러나지 않은 여성성의 사례도 적잖이 있을 테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다처럼 자신만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여성은 드물다.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한 것, ‘이다적인 것’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여성에 대한 구닥다리 고정관념들이 판을 치고 있고 이에 따라 ‘더럽고 치사한’(이 말은 언젠가 내 아내가 한 말이다) 여성의 현실을 유도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여성성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혹자는 ‘우리 시대의 소녀’라며 ‘소녀성’으로 다잡으려고 하지만 그녀의 허접질을 다잡기에는 적절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허접질 사례들은 소녀성으로 묶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다차원적이다. 소녀성이란 개념은 적어도 현실의 맥락에선 상당히 고착화된 것, 그런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그녀의 허접질을 과연 다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개성적으로는 마치 럭비공 같다고 할까, 그런 사적인 느낌을 강렬하게 받기 때문이다. 물론 럭비공 같다고 해서 늘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럭비공 역시 종종 튀기는 하지만 어느 한 구석에 잠자코 드러누워 있어야 하는 경우처럼 그녀의 허접질 역시 차분하게 성찰하는 지점들 또는 그런 성찰이 배인 엽기발랄함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 말대로 ‘영원한 어린아이’ 또는 ‘어른 되기 싫어서 발광하는 그냥 어린애’가 가장 맞지 않을까. 그녀가 영원히 어린애로 남기 원한다면, 또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어린애들의 엄마가 되고 얼굴에 주름 깊은 할망구가 되어도 영원한 어린애로 살아간다면 그녀는 다름아닌 노인애다. 노인애가 될 때 비로소 그녀는 노인소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소녀가 아닌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

(영원한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이다는 지금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를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은가 싶다.)

그녀가 영원한 어린애를 주장하는 것처럼 누군가 영원한 노인을 주장한다면 그/그녀도 다른 노인들보다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더 느리게 간다는 의미에서 ‘애노인’이다. 이는 그녀와 같은 영원한 어린애 곧 노인애가 다른 어린애들보다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더 느리게 간다는 의미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노인애가 아닌 애노인이라는 색다른 인간유형을 생각해볼 수 있고, 그런 사례가 어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페미니즘적 시각의 여성성과 관련해선 그녀의 허접질은 ‘자기(여성) 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 (animus)를 자각한 형태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허접질 못지않게 내 아내도 삶 그 자체로 대단히 아니무스적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머니와 아내를 통해 ‘자기(남성) 안의 여성성’인 아니마(anima)를 종종 느끼고 행위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물론 나는 그녀처럼 깊이 있게 자각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허접질은 어떤 정해진 틀을 갖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작품이라 하기도 참 민망하고, 허접질이라 붙이니까 딱이더라. 그리고 이다의 그림, 이다의 사진, 이러면 넘 한분야만 강조되지 않냐. 그냥 내가 쪼물락대고 싶은 거 허접하나마 다 쪼물락대고 싶고 그래서 그냥 허접질이라 부른다.”

그녀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이다의 허접질이라는 말보다는 이다질이란 말이 더 맘에 든다.” 결국, 그녀의 허접질은 그녀가 ‘이다질’(2daplay)이라고 부를 만큼 유일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 유일성의 의미는 창조적이라는 데 있다.

그 창조적인 이다의 유일성은 예술(나는 그녀의 그림, 사진, 글쓰기 모두 예술로 보고 있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의 직접적인 모든 계기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상의 예술화 내지는 일상의 미학을 실천하는 한 가지 사례라는 판단이다. 미술관 안에 갇힌 미술이 아닌 ‘미술관 밖 미술’, 일상과 무관한 예술이 아닌 일상을 미화하는 ‘일상예술’, 예술이 삶이고 삶이 예술인 ‘삶의 예술’.

그녀의 허접질 사례들을 예시하며 이러쿵저러쿵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왜 그림이 전부다 뻘거벗고 있냐? …고흐한테 해바라기 왜 그렸는지, 보티첼리한테 비너스 왜 그렸는지 묻는 사람 있나?(이 대답도 맨 날 한다. 지겨워 죽겠다. 제발 그만 좀 물어!)” 이런 그녀를 배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영원한 어린애 나아가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로 존재하기를 이 짧은 글을 통해 소망하는 까닭도 있다. 그럼,

‘늙지 않는 이 소녀를 보라!’(http://www.2dapl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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