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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글쓰기

〔문화/하다말다〕글쓰기?

벼리 | 기사입력 2007/04/01 [21:54]

무관심의 글쓰기

〔문화/하다말다〕글쓰기?

벼리 | 입력 : 2007/04/01 [21:54]
글이란 ‘글쓰기’다. 여기서 글은 물음이고 글쓰기는 답이 될 터. 그러므로 <글이란 ‘글쓰기’다>라는 문장은 ‘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글은 글쓰기다’라는 답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있다. 글이란 글쓰기다. 글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림이 그림 그리는 것이고 노래가 노래하는 것이듯 글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행(遂行)’이며, 이 점에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동사로서의, 수행으로서의 글쓰기가 머리 굴리기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실로 천의 얼굴을 가진다. 비유하자면 먹고 마시고, 찡하고 구토하고, 때리고 맞고, 이기고 지고, 환호하고 슬퍼하고, 쏟아내고 침잠한다. 그리고 풀리는 글쓰기도 있고 풀리지 않는 글쓰기도 있다. 글은 삶과 같다. 머물지 않고 삶을 살아가듯 글쓰기는 삶쓰기다. 글이 저가 살아내는 삶과 달라서는 안 된다는 논지도 이런 이유에서만 성립된다. 그런 글쓰기는 말하자면,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글쓰기 그것일 것이다.
 
▲ 무관심이란 비관심이 아니며 순수한 관심이다. 삶쓰기로서의 글쓰기는 무관심해야 한다.     ©성남투데이

어떤 단순한 성정의 관료는 “저승사자가 되어 갚겠다”는 농담을 내게 했다. 그는 지방자치를 감시하는 견지에서 수행한 글쓰기로 인해 몇 차례 곤혹을 치렀다. 그가 저승사자가 되면 나는 꼼짝없이 그에게 불려가야 한다. 얼마나 그에게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저승사자가 되어 나를 불러 앙갚음하기 위해서는 그는 나보다 먼저 ‘돼져야’ 한다!) 글쓰기의 효과가 있었음을 그의 말에서 확인한다. 그러나 그가 일리 있는 말을 할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글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어떤 이가 내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실은 비판적인 글을 삼갔으면 하는, 그의 소망을 담고 있다. 설령 내 글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자신의 평소 처지나 생각의 연장선에서 한 말이다. 그런 입장이나 관점에 조응하냐 조응하지 않느냐를 문제삼은 말인 셈이다. 이런 경우는 이른바 입장이나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문제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를 나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의 삶이야말로 구인류의 현존이 아니겠는가.

글쓰기를 신념이나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따위를 관철하려는 도구로 일삼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인식에서 ‘선험적’이며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이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현실에서 ‘패권주의적’이다. 거대언론, 글쓰기가 다반사인 어용지식인들 사이에서 잘 보인다. 이들은 지극히 위험하다. ‘우상’을 만드는 이데올로그들이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글쓰기를 직접적인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속물적인 관심에서 도구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양아치’로 불러야 한다. 전자가 고급티를 낸다면 후자는 안팎이 쓰레기와 같다.

글은 글쓰기이며 글쓰기는 삶쓰기와 같다고 했다. 이런 태도에서는 글쓰기는 그 무엇의 도구가 아니다. 도구라는 것은 그 무엇의 하수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무엇은 남이거나 제 것이라도 해도 뼈를 깎고 살을 찢는 성찰을 통하지 않은 것이다. 하수인 노릇하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현혹하지만 꿰뚫어보는 이에게는 전혀 매혹적이지 않다. 아무리 화장해도 그것은 역한 냄새만 풍길 뿐이다. 언론과 어용지식인의 담론에서 하수인 노릇하는 글쓰기는 생각보다 범람한다. 그것을 나는 늘 직시해 왔다.

글쓰기가 그 무엇의 도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글쓰기는 대상에 대해 ‘무관심’하다. 무관심이란 비관심이 아니다. 비관심이란 관심의 반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관심은 대상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이 때 주의 집중은 신념이나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에 물들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이해관계도, 속물적인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순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주의 집중은 무관심한 것이다. 무관심한 주의 집중은 순수하다. 이 순수함은 니체가 말한, 이른바 ‘거리의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관심한 태도에서 주의 집중의 대상은 ‘대상 자체의 특질’이다. 가령, 대상이 사람이고 그가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고 치자. 그것은 대상 자체의 특질로 다가온다. 대상 자체라는 말은 관찰자와 친하냐 친하지 않냐, 이해관계가 있냐 없냐, 하다못해 아느냐 모르냐와 같은 외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관찰자의 무관심은 대상에 대해 아주 냉철하다. 이 냉철함이 대상이 된 사람의 입장에서 냉혹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글쓰기는 삶쓰기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듯 글쓰기 역시 쉽지 않다. 차라리 그것은 외로움의 길이다. 특히 사람 자체나 사람과 관계된 일을 다루는 경우, 비난과 오해 심지어 물리적인 위해마저 뒤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그릇된 인식이나 판단, 이해관계나 속물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외로운 길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딪칠 수 없을 때는 받아들이는는 것이 낫다던가. 이 점에서는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가 있다. 순수하다는 의미에서의 젊음을 잃지 않은 사람에게나 해당된다. 젊지 않은 사람이 어찌 꽃보다 아름다울 수가 없겠는가. 특히 관찰자가 속을 들여다보고 그 속이 겉과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때 그/그녀는 추하다. 더구나 추한 그/그녀가 잔머리를 굴릴 때 나는 절망한다. 그러나 절망이 다는 아니다. 절망 곁에는 희망의 그림자가 늘 어른거린다. 그 그림자는 아마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그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느낌, 그런 예감이 없다면 아마 글쓰기는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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