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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적 횡포 그리고 일상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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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적 횡포 그리고 일상파시즘

〔문화/하다말다〕‘최윤길 폭언’에서 읽는다

벼리 | 기사입력 2007/05/27 [22:36]

권력적 횡포 그리고 일상파시즘

〔문화/하다말다〕‘최윤길 폭언’에서 읽는다

벼리 | 입력 : 2007/05/27 [22:36]
‘나이 따지기’는 권력적인 횡포

‘이원적인 기계’에서 ‘분할’이 생겨난다. 기계 안에선 운동방식이 정해진 대로 종속되고 통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원적인 구분은 단순구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구분되는 순간 권력배치가 작용한다는 뜻이다. 가령 최근 한나라당 최윤길 의원이 열린우리당 윤창근 의원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쏟아낸 폭언 “너, 몇 살이야, 나보다 두 살 어린놈이 건방지게!”는 이원적인 기계다.

단순한 나이따지기(구분/분리)에 그치지 않고, ‘나보다 두 살 어린놈’이라는 나이를 따지는 순간 ‘기어오른다’거나 ‘대든다’거나 하는 것은 ‘봐줄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어오른다’거나 ‘대든다’거나 ‘봐줄 수 없다’는 말들은 그런 말들을 하는 주체와 그런 말들을 입게 되는 상대 사이에 권력이 가해지고 입게 되는 작용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점에서 흔히 말하는 이원적인 구분과 이원적인 기계는 다르다.

이원적인 기계의 사례들은 아주 많다. ‘나이 따지기’, ‘출신고향 구분하기’, ‘학벌이나 출신학교 구분하기’, ‘남녀의 차이 강조하기’, ‘강남출신’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아는 대표적인 이원적인 기계들이다. 특히 앞에 세 가지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권력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횡포는 자심함을 넘어선다.

가령 한국사회에서는 맑스주의자들이 구분했던 고전적 의미의 계급이나 서민들의 통상적인 구분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보다 학벌이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다. 이른바 명문고나 일류대학 동창이라는 끈의 의미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한다. 출신고향을 구분하는 일이 정치적 피아구분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어떤 기제로서 작용하고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다. 나이를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최 의원의 나이 따지기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처세의 영역이 아닌 공론장에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한 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 따지기와 같은 이원적인 기계가 처세의 영역을 넘어 공론장에 침투된 것은 그만큼 공론장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공론장에 나설 자질이 안 되는 사람들이 공론장에 나서서 공론장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최 의원의 폭행, 폭언문제가 불거지자 어느 기자 같지도 않은 기자라는 직함을 가진 자가 윤 의원의 발언을 ‘언어폭력’으로 ‘오도’했다. 공론장, 공론화의 공자도 모르는 어느 얼치기 기자는 ‘공론장’에서 발생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다른 지방의원들 앞에 나선 일을 두고 ‘집안일을 손님에게 고자질하냐’고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 집안일이라니? 손님이라니? 이게 ‘가족’의 문제인가?

이런 행태들 역시 심각하게 공론장을 무너뜨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지역언론 역시 공론장이자 공론화의 중요한 기제 아닌가. 이들의 발언 아닌 발언은 그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천박함’만 드러낼 뿐이다. 최 의원의 폭언, 폭행이 지닌 사회·문화적 의미를 제대로 생각도 해보지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기자들(?!). 그들도 입조심해야 한다. 건강한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학을 다녀왔거나 이국생활을 오래한 이들의 체험에 따르면 ‘열린 사회’일수록 나이, 고향, 학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이의 경우 나이를 따지지 않는 것, 나이가 몇 살이 아니라 나이 차이가 10살이 훨씬 넘어가도 친구 되는 일은 흔하다 못해 일상적이다. 나이에 따른 서열이나 위계는 삼류사회에나 어울린다. 열린 사회, 창조적이고 참여적인 사회에서는 한 마디로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일찍 학교를 때려치우고 검정고시를 통과했던 내 경우 청소년기, 청년기에 나이 많은 친구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반대로 나이 어린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경우가 흔해졌다. 아직도 겨우 두 살 차이를 내세워, 그것도 시민의 대표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공론장에서 동료의원을 폭언하고 폭행하다니! 의원 뱃지 떼이고도 남을 일 아니겠는가.

‘나’라니? 나가 어디 있는데!

파시즘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다 알려진 대로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 군국주의자들, 스탈린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하나의 체제로서의 그런 ‘역사적 파시즘’이 있다. 다른 한편 누군가로 하여금 권력을 그리워하게 하고 따라서 누군가를 지배하려 들게 하고, 권력과 그 작용인 지배를 욕망하게 하는 파시즘이 있다. 이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한다.

일상적 파시즘의 위험을 말할 때, 핵심은 이 일상적인 파시즘이 일상적인 사고나 감정, 행동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체제로서의 역사적 파시즘이 전인류의 생존을 위협했듯이 일상적 파시즘 역시 일상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존엄과 심지어 생존까지도 위협한다. 일상적 파시즘으로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은 ‘파시스트적 주체’라고 불러도 괜찮다.

‘파시스트적 주체’는 ‘개인’과는 전혀 다르다. 개인은 나, 너, 그, 그녀 등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개인주의자로서의 ‘나’는 ‘너와 같은 타자’를 수용하고 배려하는 입장을 취하므로 ‘모든 개인을 위한 나’다. 반면 파시스트적 주체로서의 ‘나’는 너와 같은 타자를 수용하고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개인을 배제한 나’다. 결국 ‘나를 위한 나’다.

그러나 파시스트적 주체는 나가 개인에 속한다는 점을 모르고 또 체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를 위한 나’란 실은 ‘허구’에 불과한 셈이다(불가에서 ‘나란 게 어디 있느냐’고 일갈하는 것, 비판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사유를 ‘허구’로 보는 것은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는 파시스트적 주체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사회병리적인 편집증세일 뿐이며 따라서 타율적이고 자유를 상실한 개인이라는 뜻을 낳는다.

최 의원이 윤 의원에게 폭언을 자행하면서 맨 앞에 내세운 나는 ‘허구’에 불과한 나 따라서 ‘ 나를 위한 나’ 따라서 ‘모든 개인을 배제한 나’다.  곧 그가 파시스트적 주체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것의 실제 의미는 그가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타율적이고 자유를 상실한 개인이며 따라서 사회병리적인 편집증에 걸려 있다는 고백일 뿐이다.

공론장에서 최 의원이 윤 의원에게 이원적인 기계를 들이댄 것은 ‘파시트적 주체로서의 나’를 내세워서만 가능했다. 의원들은 관례적으로 ‘본의원’이라는 주체 표현을 한다. 그 의미는 본의원은 모든 의원들의 일부이며 따라서 모든 의원들은 동등하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시민의 대표라는 것이다. 본의원은 의원으로서의 ‘공적 자아(public ego)'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공적 자아(나)란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개념이다. 최 의원의 나는 이 같은 공적 자아를 스스로 무너뜨린 반사회적 개념이다.

최 의원이 윤 의원에게 이원적인 기계를 들이댔을 때 그는 사회적 의미를 갖는 의원도 아니며 여럿인 개인도 아니며, 오로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적인 나’에 불과했다. 사회성과 개인성의 상실, 사회성과 개인성이 파시스트적인 나로 치환되는 이 불행한 사태! 이런 사람을 걸러내지도 못하고 공천한 당은 대체 어떤 당이며, 이런 사람을 선거에서 아웃시키지도 못하고 의원이랍시고 뽑아주는 유권자들은 어떤 유권자들인가!

일상적 파시즘의 뿌리가 결국 파시스트적인 사회에 있다면, 결국 사회가, 지역사회가 그만큼 부실하다는 반증을 최 의원이 보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다른 실례로 최 의원문제가 터지자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성찰의 계기로 삼기보다 오히려 최 의원으로 하여금 더 폭언하고 더 폭행하라고 거리낌 없이 나서는 악플러들. 아, 삼류의 사회, 삼류의 지역사회, 삼류의 나들!

엄습하는 절망감……제기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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