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아무래도 포기해야…

〔문화/하다말다〕 벼룩들의 세상

벼리 | 기사입력 2006/08/12 [03:16]

아무래도 포기해야…

〔문화/하다말다〕 벼룩들의 세상

벼리 | 입력 : 2006/08/12 [03:16]
▲ 네이버 백과사진에서 찾은 이 벼룩 도해는 다음과 같은 흥미(?)를 끄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암수 모두 흡혈한다. 높이 20cm, 나비 35cm나 도약한 기록이 있다. 벼룩은 페스트 외에도 발진열(發疹熱)을 매개한다.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한다.”     © 성남투데이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어르고 때려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며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임을, 그것이 비관에서가 아니라 낙관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요즘 나는 다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사람의 유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람을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 있는 하나의 밧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원숭이 같은 존재 그리고 사람을 넘어선 존재 사이에서 마치 외줄을 타는 광대와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사람을 짜라투스트라는 마치 걸리버의 여행기에 나오는 것처럼 퇴화한 소인에 비유했다. 소인은 인간의 진화가 아니라 퇴화의 메타포다.

소인이 된 사람들의 구호는 무엇일까? ‘튀자!’, ‘뜨자!’ 중력으로부터의 이탈이 고작 이 수준이라니. 그러므로 그것은 니체가 보기에 뛰어봤자 벼룩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렇게 비꼬았다. “대지는 작아져 버렸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아지게 만든 최후의 인간들이 날뛴다. 이 종족은 벼룩처럼 근절시킬 수가 없다.” 인간이 도달한 최후가 벼룩이라니!

벼룩들의 세상에선 튀기 위해, 뜨기 위해 갖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어떤 자들은 잔대가리 굴리기에 일가견이 있다. 어떤 자들은 남들보다 큰소리치기에 바쁘다. 어떤 자들은 가면놀이에 능숙하다. 어떤 자들은 힘을 오로지 양으로만 표현한다. 어떤 자들은 자리 지키기가 전부여서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어떤 자리가 있다고 치자. 내가 보기에 그 자리는 전망을 제시하고 그 전망에 걸맞는 일을 해야 하는 자리다. 나머지 일상적인 일들은 그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들에서 이루어지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어떤 자리가 전망도 없고 전망에 걸맞는 일이 나오지 않자. 시스템은 결국 망가져버렸다!

또 어떤 자리가 있다고 치자. 내가 보기에 그 자리는 끝없는 아이디어들이 창출되고 실천되어야 할 자리다. 나머지 일상적인 일들은 간단히, 아주 간단히 처리되면 그만인 자리다. 그런데 그 어떤 자리는 전도되었다. 거꾸로 뛰는 벼룩이다. 그 안을 살펴보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벼룩들의 튀기.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 무기력이다. 체(體)가 그러하고 용(用)이 그러하다. 어떻게 그 무기력함을 아는가? ‘도대체 왜 하는데? 무엇 때문에 하는데?’라는 아주 간단한 질문 앞에서다(이 질문을 얕잡아보지 마라). 무기력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도 몰라? 나도 몰라!’ 바로 이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 벼룩들의 세상, 다람쥐 체바퀴 돌아가듯 이렇게 돌아간다!(그러나 과연 돌아가는 것일까?)

소인 곧 벼룩들의 세상은 결국 포기를 불러들인다. 포기하고 갈 수밖에 없다. 포기는 그러나 포기에 그칠 수 없다. 그것은 ‘변신’을 요구한다. 니체가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다. 낙타는 무거움에 잘 견딘다. 사자는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럼 아이는?

아이는 존재의, 존재방식의 새로운 표상이다. 아이는 부정, 부정의 힘인 낙타와 사자의 운명이 아니다. 긍정 그 자체이며 긍정하는 힘이다. 니체가 말했다. 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라고. 진화가 아니다. 진화는 퇴화였다. 변신은 결코 진화일 수 없다.

변신은 사즉생(死卽生)이다. 죽음에서만 변신은 찾아든다. 삶의 마지막에 찾아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증언할 수 없다. 오해다. 착각이다. 죽음은 오직 변신이다. 삶이 곧 죽음임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으로 삶이 영위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디오게네스가 한낮에 등불을 켜고 찾아다닌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아마도 그들은 날기 위해서 연이륙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어쩌면 이미 날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변신 중이거나 변신했을 것이다. 그들은 날아서 전체와 세부를 볼 것이다. 더 높이 날아서 멀리 더 멀리 볼 것이다. 그들의 존재(體)-방식(用), 그 비상(飛上, 飛翔)의 알레고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벼룩들은 결코 날지 않았다, 그들은 변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 권력적 횡포 그리고 일상파시즘
  • 무관심의 글쓰기
  • 가까이 온 봄, 가까이 두다
  • 이것은 은행나무 화분이 아니다
  • 늙지 않는 이 소녀를 보라!
  • 구체 그리고 섬세의 정신
  • 똥과 된장, 그리고 수호천사
  • 바라본다
  • 어른부터 반성해라
  • 영어마을·특목고를 생각한다
  • 아무래도 포기해야…
  • 당신은 지금 어느 계절인가?
  • 자기만의 명품
  • “금연하는 이대엽 시장은 멋져!”
  • 성공할 수 있을까? ‘바르게 살자’
  • 그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 말할 수 있는 것, ‘섹스’
  • 원수를 사랑하라!?
  • 개도 개 나름이다
  • 많이 본 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