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디셀러 영화인 뤽 베송 감독의「그랑블루」는 보는 내내 낯설다. 보기 드문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인내심이 아니고는 이 영화 종반부까지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종반부에 가서는 끝내 낯설음이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잠수부가 저 바다 밑바닥을 오히려 더 편하게 여긴다는 설정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황당하지만 이해가 되니 더욱 황당해진다. 그러면서 긴장은 이내 가슴 먹먹함으로 바뀐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그리스 앞 바다에서 잠수를 하면서 돌고래와 어울렸던 주인공은 그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그의 뱃속에 든 2세를 뒤로 남긴 채 바다로 뛰어든다. 일테면 돌고래가 있는 바다는 그의 영원한 고향인 셈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지상이 고향이 아니고 돌고래와 함께 헤엄치며 살았던 해저가 고향이라는 설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의미를 곱씹기에 앞서 슬픔이 저미어오는 것을 느꼈다. 사실 나도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고 살아온 까닭이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내 고향은 있기나 한 것인가? 내 마음을 붙이고 살만한 사람들의 숲은 과연 있는 것일까? 무작정 길을 떠나야 하는 이곳, 사막이 나의 영원한 고향일까? 「그랑블루」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뤽 베송 감독의 전략은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영화는 시리고 아픈 영화였다, 내게! ○…서울에서 출판사하는 친구와 건설업을 하는 친구가 갑자기 들이 닥치는 바람에 정자동 카페골목 재즈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잠시 감상에 젖었다. 우리는 게오르그 루카치의「소설의 이론」과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시적으로 씌어진 각각의 책들은 하나의 훌륭한 철학서적이다. 별을 헤며 걸었던 아득한 고대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풍부했을까? 신은 죽었다라는 절규는 기존의 잘못된 고향을 아름답게 갈아엎은 것이다, 삶은 덧없는 것도 그렇다고 영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고향상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누군가의 소설제목 한 구절처럼 각자 제 이름을 부르며 속으로 울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겠지. 나는 취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새벽녘에 나의 사막 위에 떠있는 움집으로 기어들어가서 웅크린 채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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